13. 알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③
신이 우리 가족을 도우려 하는 건지 더 힘겹게 하려는 건지 모르지만, 매형의 소망은 쉽게 이루어졌다. 함평출장소 영업부 김 부장님의 정년퇴직으로 부서 이동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매형의 자리를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한전 일에 관한 한 기술도 경험도 없는 매형이 영업부 직원이 되는 건 쉽지만은 않았다. 또 다른 부서에 영업부를 노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 매형을 취직시키기 위해 아버지는 목포 지사를 오가며 상사들에게 간청을 하는 한편 매형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될 직원에게 수긍할 만한 보상을 해주기 위해 전력투구를 해야 했다.
한 달 뒤 정식 발령을 받을 일만 남았을 때, 아버지는 큰누나 부부에게 내려오라고 전화를 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엄마는 아버지가 편해지자 절대 그것만은 봐줄 수 없다는 듯 자꾸 이의를 제기하다 결정타를 날렸다.
“동우 아빠 말예요. 영업주임을 바라볼 순 없을 테고. 그 욕심 많은 성격에 틀림없이 기술을 익혀 위험수당이 많은 설비를 하려고 할 텐데, 만약 사고라도 나면?”
“사고라니?”
아버지가 급소를 찔린 듯 미간을 찡그렸다.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지 가슴까지 움켜쥐었다. 엄마도 아버지의 고통에 전염이 됐는지 얼굴을 구기며 힘겹게 발음했다.
“가…가, 감전사고 말예요.”
아버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거야말로 말 그대로 기우지. 허, 녀석이 다쳐? 죽어? 아마 전봇대가 녀석을 조심해야 할 걸. 만나면 조심하라구 일러줘야겠네.”
“지금이 농담할 때에요?”
“당신도 생각해봐. 처남과 초희 신랑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전기 사고로 죽었다는 것 말고도 또 있어. 바로 착하고 분별 있고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살려고 무던히 애쓴 놈들이라는 거야. 어디 승기가 그래? 택도 없지. 흥, 그런 놈은 주위 사람 생각 안 하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오래 살아. 옆 사람들은 괴로워도 저는 잘 살아. 걱정하지 마!”
아버지는 이번엔 아주 대책 없어 보이진 않드만 뭐, 하고 토까지 달았다. 신기한 건 엄마의 얼굴이 정말 희망이라도 찾은 사람처럼 밝아졌다는 것이다. 어른들이 황당한 비약인 것만 같은 성경 말씀 속 기적들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건 잘 알지만, 요즘 우리 식구들의 안간힘을 보면 슬퍼졌다. 믿지 않고선 단 한순간도 화목한 척할 수 없어서 온 힘을 다해 믿으려 하는 게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밤이 되자 아버지의 얼굴도 평온해졌다. 나를 사이에 두고 엄마와 나란히 누웠을 때 그는 손깍지를 껴서 머리를
받치고 천장을 봤다.
“어쩌면, 전생에 내 아들이었는지도 모르지.”
엄마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천장만 노려봤다.
“전생에서… 아예 태어난 것도 몰랐거나 어릴 때 잃어버려서 키우지 못한 아들이 있을 수 있지 않겠어?”
“이젠 정말 별 말을 다 하시네.”
엄마가 사납게 눈을 흘겼지만 아버지는 웃지도 않았다. 천장을 뚫어져라 보는 아버지의 눈 속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끈질긴 불씨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숨을 토해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 돈 내놔라, 자리 만들어라, 내 인생 책임져라 할 수가 있어? 외면할 수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내가 죄가 없다면 어떻게 이렇게 꼼짝없이 매일 수 있어? 아무리 수희 녀석 짝이라지만.”
*
한 달 뒤 집안 분위기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아버지가 한창 잘 나가고 우리가 아직 철들지 않아 화사하기만 하던 목포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집 곳곳에 기쁨 바이러스를 분사해버린 이는 바로 갓 두 돌을 넘긴 동우였다. 발육이 유난히 빨라 벌써 쌩쌩 달릴 줄도 알고 또래 아이들에 비해 어휘력도 월등한 녀석은 세상에서 가장 원기왕성한 사나이였다. 심지어 그 애는 동네 여기저기서 마주치는 짐승들과도 잘 어울렸다. 집의 장닭들이나 옆집 강아지와는 처음부터 장난을 치고 놀았고, 신경질쟁이 거위가 보초를 서는 집에 가도 낯가림도 없이 발을 턱턱 구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가끔은 돌을 주워 던지기도 했다. 나중엔 짐승들도 녀석이 나타나면 골치가 아픈지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동우가 하루 종일 바쁘게 노는 모습을 보노라면 부모를 잃기 전의 매형이 저렇듯 화창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동우처럼 살다 가장 중요한 혈관이 다치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정한 남자가 돼버린 듯했다. 그래도 술래잡기를 한답시고 작은 화분을 안고 집 뒤쪽으로 달아나는 동우를 보며 아버지가 웃는 걸 보고 있으면 우리 집에 행복이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전처럼 큰누나에게 욕심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내가 보기에도 행복과 욕심은 서로 상관이 없는, 아니 서로를 싫어하는 단어들인 듯했다.
매형은, 편안해 보이긴 했다. 넥타이까지 맨 양복 차림으로 회사와 집만을 오가는 생활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자주 보니 또 다른 그로도 보였다. 물론 그는 가끔 감정의 신경전에 지쳐 생기를 잃은 허탈한 껍질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매형을 매형이게 하던 에센스는 수명이 다한 것일까. 나는 궁금했다.
매형은 누나나 동우에게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다. 남편의 의무, 아버지의 의무를 보통 남자의 삼분의 이만큼만, 덤덤하게 해냈다. 그래도 회사 일은 잘했다. 순발력 좋은 사람답게 잡무들에 빨리 적응해가더니 최근엔 영업주임의 수족이 되어 그를 보필하고 있었다. 출장소장 사위인 데다 성격까지 엽렵하고 화통한 매형을 영업주임은 노골적으로 편애했다. 가끔 은 자신의 일도 맡기는 것 같았다. 둘의 밀착이 다른 직원들을 자극할까 봐 걱정을 하면서도 그의 빠른 정착 자체엔 안심하게 되곤 했다.
그가 옛날 모습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다. 술을 마셨을 때였다. 뜻밖에도 술이 별로 세지 않은 그는 소주 한 병만으로도 엉뚱한 예술가로 되돌아와 내 미술 숙제에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고, 파스텔과 먹, 먼지 등을 활용해 독특한 그림을 그려주어 학교에서 주목받게 해주었다. 가끔은 시골에선 구경도 하기 어려운 고급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그가 찍어주는 사진들은 하나같이 차려 자세로 정면을 보고 있는 우리네 보통 사진과는 달랐다. 그는 피사체를 이완시켜 생생한 표정을 잡아낼 줄 알았고, 스쳐 지나가는 의미 있는 순간들을 기민하게 굳혀냈다.
나는 그가 찍은 흑백사진들을 보며 자연은 물론 무생물도 표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