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알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①
막내 누나의 독보적인 선전은 나를 여러 측면에서 압박해왔다. 오학년 겨울 방학식 날 귀가하자마자 안방 아랫목에서 잠이 든 나는 나직한 어른들의 말소리에 잠이 깼다. 토요일이라 빨리 퇴근한 아버지와 엄마가 나를 사이에 두고 누워 한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평소에 가족들 앞에서 연출하던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서 나는 계속 자는 척했다. 엄마가 아버지 쪽으로 돌아눕는지 엄마의 달큼한 숨이 내 왼쪽 귀를 후끈하게 덥혔다.
“여보, 수형이 말예요. 아무래도 이 시골에선 불안하지 않아요?”
“불안하다니…… 뭐가?”
아버지의 목소리는 불만스러웠다. 내 얘기를 꺼낸 것 자체가 아버지가 좋아하던 어떤 분위기를 깨버린 듯했다. 그러나 엄마는 개의치 않았다.
“손해를 볼 수밖에 없지 않냐구요?”
“중학교? 왜? 함평국민학교 수준이 낮아서?”
“아, 낮기야 낮죠.”
“그럼 재희는 함평국민학교를 나와 어떻게 목포여중을 수석으로 갔어? 또 지금 전남여고에서도 수석을 하고 있잖아.”
“아, 걘 특별하잖아요. 그만 못하면 부모가 환경을 만들어줘야죠. 아무래도 광주에서 누나들이 데리고 있어주면…….”
“중학교 가려고 광주로 전학을 시켜? 그러려면 딸들을 달리 키웠어야지. 셋째가 남동생을 돌볼 수 있을 것 같아?”
“재희 있잖아요?”
“안 돼. 재희 공부에 방해돼. 걔가 수형이 끼고 지금처럼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 수형이 아버지 맞아요? 아들이 중하지 어떻게 딸을…….”
“그만해!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선 안 새? 언제 어디서든 환경을 이겨낼 줄 알아야지. 오히려 환경 탓을 하며 찌질거리니! 흥, 사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해? 흐음, 그래도 생각은 한번 해보지, 뭐.”
엄마가 몸과 마음이 다 식어 내 쪽으로 돌아눕는 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냉정한 판단에 자존심을 다친 듯했다. 이렇듯 아직 자신과 아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가 바로 내 엄마였다. 그런데 전과는 달리 엄마의 맹목적인 애정이 힘이 아닌 난처한 짐이 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중학교 입시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누나들 대부분이 명문 여중을 거쳐 명문 여고로 진학한 상황에서 외아들인 내가 광주의 명문 중학에 떨어지면 창피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내게 쏟아질 기대 속의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괴리는 점점 또렷해질 것이다. 나는 조바심과 불안을 다스리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될 것이다.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광주의 명문 중학교에 입학하면……. 함평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토미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부과한 의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 해도 토미는 할 말이 없다. 또 나를 응징할 마땅한 방법도 없다.
그뿐인가? 토미 뒤에 숨어 나를 갈취해온 함평중 불량배들도 황금 새가 새장에서 벗어나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나는 합법적으로 해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짜릿한 해방감도 잠시, 나는 어이가 없었다. 토미와 내가 전생의 원수처럼 처절하게 얽혀 싸우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의 문제가 우리 아닌 외부에 의해 교통정리가 돼버린다는 것이.
나는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나 맨발로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부모님이 나를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레몬 빛 햇빛 속에서 나는 생생한 굴욕감을 느꼈다.
*
다음 날 오후 네시 토미가 주문한 물건들을 갖고 약속 장소로 나갔을 때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오십 미터쯤 앞에서 끝이 처진 눈매에 힘을 잔뜩 주고 걸어오는 토미의 외모부터 달라보였다. 거북이같이 짧은 목을 어깨에 파묻어 껑충해 보이는 실루엣도 우스웠고, 한국의 시골 풍경과 겉도는 갈색 피부도 거슬렸다. 녀석의 특별한 외모가 다시 약점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은 어제보다 더 나갔다. 녀석 앞에서 복종하는 시늉을 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녀석은 나를 좇아 이곳을 떠날 주제도 못된다. 일단 공부부터 안 되지 않는가. 문득 녀석의 미래가 어렴풋이 그려졌다. 잘 해야 운동선수, 나쁘면 공포와 경멸의 대상인 깡패가 되어 세상 밑바닥을 전전하는 모습이. 순간 엄청난 쾌감이 가슴을 훑고 등 쪽으로 갔다.
나는 어깨를 좍 폈다. 결국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기일 것이다. 한순간에 심리적 파워 게임의 판도가 바뀐 걸 알았는지 아니면 내 기운에 눌렸는지 토미는 부들부들해져 있었다. 그의 눈의 표정이 비참함으로, 난처함으로, 그리고 유순함으로 바뀌는 데는 단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토미는 내가 건넨 봉투를 받아 책가방 속에 쑤셔 넣은 뒤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맙다.”
녀석은 유난히 오래 가방을 여몄고, 나는 돌아서서 먼 산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잠시 후 녀석이 내 옆으로 와 나란히 섰다.
“오늘, 바쁘냐?”
“아니.”
“나랑 어디 갈래?”
“어디?”
나는 토미를 봤다. 그는 정체를 알아낼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어떤 변화에 대해 이미 결론을 내렸으면서도 습관적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다시 먼 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미가 힘없이 말했다.
“그냥 놀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둘 다 아는 장소로 향하기라도 하듯 동시에, 한 방향으로 돌아섰다.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앙숙이기도 한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한참 걷다 보니 문득 내가 영화 속에서처럼 전생에 녀석의 가족을 몰살했거나 그의 아내를 빼앗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가 나쁜 일을 하거나 궁지에 빠질 때마다 귀신처럼 나타나 나를 바보 아님 범죄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가?
옆 동네로 들어섰을 때 토미는 종수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달변도 아닌데다 툭툭 끊어지기까지 하는 녀석의 서투른 고자질 속엔 놀라운 내용은 없었다. 듣는 척하는 것조차 지루할 만큼 다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 이상했다. 반응을 기대할 만한 충격적 진실이 없는 이야기를 왜 저렇게 오래 할까?
한참 후에야 나는 녀석이 일종의 제안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즉 종수가 가진 대장 자리를 빼앗아 내게 줄 수도 있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그 제안은 더 이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흥, 이제 와서, 싶기도 했지만 이미 내 처지가 대장 자리에 연연해하며 마냥 놀아도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또 놀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갈망해온 것들이 생각보다 시시한 것이라는 자각은 날 허탈하게 했지만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었다. 또 나는 바보도 아니었다. 악마와, 그것도 힘도 없는 악마와 거래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십분쯤 걸어 도착한 곳은 적벽이라 불리는 절벽 앞이었다. 긴 세월 자연의 세공으로 섬세하게 빚어진 면 곳곳에 풀포기들을 키워온 붉은 절벽이 강물 속에 제 쌍둥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뜻밖에도 풍류나 가족나들이를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했다. 이곳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멀리 사복을 입은 함평중 불량배들이 모여 노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서야 건달들이 외진 이곳을 아지트들 중 하나로 애용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우리는 건달들을 향해 걸어갔다. 토미는 거칠고 짓궂은 게임을 하며 낄낄거리고 있는 건달들 한가운데로 날 데려다놓았다.
“모두 본 적 있지? 함평 한전 출장소장 집 수형이. 알지?”
건달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척을 했다. 한낮의 유흥으로 찐 양배추같이 푹 익어 벌게진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그들은 외계인 같았다. 그때 동물적으로 생긴 외계인 하나가 툭 튀어나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우, 우리의 유능하신 물주?”
“이 꼬맹이가 우리 유흥비를 반 년 넘게 보태줬다고? 이렇게 멀끔하고 호리호리한 놈이? 새끼, 어린 게 수완이 보통이 아니네. 너 도둑질뿐만 아니라 거짓말도 잘하지? 너, 이 형님이 파출소에 고자질해 감방에 콱 처넣어버린다.”
건달들이 우르르 웃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건달이 다시 내 머리통을 쥐고 마구 흔들었다. 나는 에이 씨, 하며 그의 손을 털어냈다. 그가 어쭈, 하며 나를 때리려 하다 멈췄다. 내가 귀찮아하고 있다는 걸 안 것이다. 주위의 건달들도 기가 막히는지 날 손가락질하며 계속 투덜거렸다.
그때 비로소 모래 위에 펼쳐진 돗자리 위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훔쳐 왔을 사과와 홍시, 미제 완두콩 통조림, 베이컨, 소주, 담배, 그리고 긴 속눈썹에 감싸인 눈을 가늘게 뜨고 두 다리를 활짝 벌린 금발 여자들로 가득한 포르노 잡지들……. 한마디로, 적벽 앞은 금지된 것들의 집합소였다.
나는 건달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봤다. 중학교 이학년이거나 삼학년일 그들의 눈 속엔 피로와 불안이 흥건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길이 또렷하게 갈려가는 상황에서 그들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습게도 나야말로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았다.
건달들은 애송이와의 신경전을 포기하고 강 쪽으로 몰려가 웃통을 벗고 유행가에 맞춰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재능 없는 코미디언들처럼 어설프게 히죽거리는 그들을 보며, 나는 계속 생각했다. 혼혈아가 아닌 것만 빼면 토미 보다 나을 것도 없는 저들은 오 년 후 무엇이 돼 있을까? 아마 농사꾼이 돼 있거나 깡패가 돼있겠지. 아, 농사꾼은 어렵겠다. 씨 뿌리고 김매고 수확을 기다릴 만한 인내력이 없을 테니까. 그때 문득 내가 높은 경찰이 되어 여전히 조폭 노릇이나 하는 건달들을 일망타진해 수갑을 채우는 장면이 그려졌다. 상상 속 그림이 너무 자세하고 생생해서 황홀했다. 정말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앞으로 십 년 간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