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보다 더 큰 아이들이 그의 어깨 위를 짓누르고 ①
육 개월 뒤의 어느 날 낮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은 나를 제외한 식구들이 누리고 있던 평화를 깨버렸다.
식구들이 늦잠을 자는 일요일 오전, 머리맡에서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섬뜩했다. 나는 벨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누워 있는 아버지를 흘겨보며 통화를 하는 엄마에게 착 달라붙어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린애처럼 울먹이는 큰누나의 하소연의 내용은 심란했다. 매형이 집 전세금을 빼서 완구 사업을 시작했는데 석 달 만에 깡그리 날리고 지금 여인숙을 전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누나가 앞에 있기라도 한 듯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주위를 봤다. 엄마는 소곤거렸다.
“그래, 알았어. 내가 아버지한테 말할게.”
“무슨 일이야?”
이미 깨어 있던 아버지가 두 팔꿈치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희 전화야?”
“…….”
“빨리 말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엄마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아버지의 얼굴이 굳었다. 아버지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외출을 하더니 금방 돌아왔다. 내 손과 똑같이 생긴 아버지의 손엔 한동안 끊었던 담배가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담배 두 대를 피운 뒤 한숨을 내쉬었다.
“못난 놈. 정 하고 싶으면 일이나 제대로 배워 벌이든지. 어이구, 그샐 못 참아서. 정말 도둑고양이같이 음침하게도 벌이네.”
아버지는 이불 위로 털썩 눕더니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눈을 뜬 아버지는 천장을 노려봤다.
“어머니에겐 말씀드리지 마. 모르시는 게 약이지.”
“알았어요. 그런데, 어떡할 거예요?”
“휴우, 왜 이렇게 올 것이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아, 어떡할 거냐구요? 애가 지금 여인숙을 전전하고 있다는데.”
“보채지 좀 마!”
아버지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날 오후부터 부부는 냉전에 들어갔다. 말만 안 할 뿐 모든 표정과 동작을 동원해 집요하게 보채는 엄마와 한동안만이라도 내버려두라고 윽박지르는 아버지의 눈빛 대결은 살벌했다. 눈이 큰 사람들이 화를 낼 때의 표정이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하는지 본인들은 모르는 듯했다.
그런데 식목일 아침 잠에서 깨보니 아버지가 집에 안 계셨다. 한 사흘쯤 서울에 다녀오겠소, 라고 적힌 메모지만 화장대 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딸이 불편해하고 비참해하는 걸 두고 보는 나날들은 그에게도 고문이었던 것이다. 엄마의 얼굴도 개운해졌다. 나중엔 흥, 네 까짓 게 버텨봤자지, 하는 듯한 의기양양함까지 내보였다.
일요일 밤 열한시쯤 내려온 아버지는 귀가하자마자 엄마가 미리 펴둔 이부자리 위에 누웠다. 엄마가 어떻게 했어요? 하고 묻자 그는 팔짱을 끼고 벽 쪽으로 돌아누워 버렸다.
“전처럼 교통도 환경도 괜찮은 지역을 골라 방 두 개에 부엌이 딸린 집을 얻어줬어. 전에 살던 집에서 가까워.”
“전셋집이에요? 월셋집이에요?”
“그 한심한 인간들이 월세 낼 돈이 어딨어?”
엄마가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벽에 기대앉았다. 내가 큰누나네 새 집 주소를 물어보려 하자 엄마는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엄마는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석 달 뒤 매형이 벌인 사업의 내용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결과를 전하는 누나의 전화를 역시 엄마를 통해 들은 아버지는 놀라지 않았다. 올 것이 왔다는 듯 지겨워하는 표정으로 이마를 거칠게 문질렀을 뿐이다.
이번엔 아버지는 단 하루도 버텨보지 않고 밤차를 타고 올라갔다. 사흘 뒤 밤 아홉시에 돌아온 아버지는 엄마가 묻지 않는데도 비슷한 지역의 비슷한 규모의 집을 얻어주고 왔다고 보고를 했다. 엄마는 칭찬도 해주지 않고 조용히 나가 준비해둔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할머니는 아예 모른 척하기로 작정했는지 당신 방에서 나와 보지도 않으셨다. 누나들도 큰누나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석 달 전과는 달랐다. 화강암처럼 딱딱해진 아버지의 얼굴엔 어디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식의 오기마저 배어 있었다. 전세금을 치를 때 마지막 순서이자 의식으로 들었을 큰누나 부부의 약속과 맹세 따위는 믿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꼭 사 개월 뒤 다시 똑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아버지는 완전히 변했다. 사고를 친 장본인이라도 된 듯 풀이 죽은 엄마를 통해 들은 큰누나의 변명과 하소연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흥, 사업은 무슨. 계속 영화 나부랭일 한다구 싸돌아다녔겠지. 전세 보증금도 그래. 첨부터 다 영화에 꼬라박았거나 야금야금 빼서 생활비로 썼거나 둘 중 하나야.”
아버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아주 버릇이 나빠. 못된 놈, 멍청한 놈, 천하에 저밖에 모르는 놈.”
아버지는 엄마 쪽으로 돌아앉았다.
“당신, 앞으론 수희에게 전화도 하지 마. 전화해서 울고불고 해도 모른 척해. 그 나쁜 놈, 이 못된 버릇 못 고치면 평생 사람 구실 못 해.”
“누가 그걸 몰라요? 그 녀석 버릇 고치는 동안 우리 딸이 말라 죽을까 봐 이러는 거죠.”
“시끄러. 지금 이 순간부터 걔들 얘긴 꺼내지도 마! 그리고 수희 불쌍해할 것 없어. 그 녀석도 똑같아. 똑같으니까 같이 사는 거야.”
“뭐가 똑같아서 살아요? 오도 가도 못하게 됐으니까 살지. 그 망할 놈의 소문 땜에.”
순간 아버지의 눈썹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가 사나워 보이는 그의 눈은 엄마의 파리한 얼굴을 통째 삼켜버릴 것 같았다. 전면전은 꽤 해도 신경전엔 약한 엄마는 말로 받아치는 걸 포기하고 얼른 빨랫감을 찾아들고 마루로 나갔다.
*
젊은 부부는 아버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막강했다. 집에서 연락이 없자 2주일 뒤 아예 짐을 챙겨 광주로 내려와 천변 근처에 월셋방을 얻어버린 것이다. 일찌감치 다녀온 엄마의 말에 의하면, 사는 곳이 열악한 것도 문제지만 꽤 많은 빚을 져 도망다니다시피 하는 신세라고 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수희 누나의 안색이 몹시 나빠졌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앞의 벽을 뚫어져라 보는 폼이 엄마가 한 마디만 더 하면 삼 년 전 포목점 사건 때같이 재떨이를 날릴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처량한 젊은 부부를 외면하지 못했다. 엄마의 사신 자격으로 광주에 다녀온 셋째 누나가 엄마, 언니가 이상해. 몸은 깡말랐는데 배는 부어 있다. 너무 굶은 사람처럼. 그리고 두 눈 밑에도 아줌마들 얼굴에 끼는 기미 같은 게 있어, 라고 말했을 때, 엄마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맞아, 맞아, 틀림없어, 라고 중얼거린 엄마는 곧 아버지 눈치나 보며 주저앉아 있을 순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당장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할머니도 이번엔 엄마가 아버지 보다 약간은 더 옳다는 사인을 여러 행동들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 후 엄마는 아버지 몰래 허름한 천변 셋방에서 인생 최악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건달과 임산부에게 쌀과 김치, 약간의 돈을 가져다 날랐다. 아버지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기분이 괜찮으면 짐이 유독 많은 엄마의 외출을 모른 척했고, 새삼 모든 것에 대해 울화가 치미는 날엔 온갖 핑계로 집에 묶어두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도 둘 모두 수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진 못했다. 워낙 예민하기도 하지만 일단 수면 위로 드러나버리면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조차 각본을 훤히 아는 연극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 우습다 못해 서글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