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남자의 왕국 ②
붉은 대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비둘기들이 마당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특유의 눈치로 마을의 분위기를 감지한데다 술집에서 불려 나온 아버지와 당직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은수 집으로 떠나는 걸 본 뒤 계속 서성거리고 있었던 듯했다.
저희들이 우리 집 문지기나 근위병쯤 된다고 생각해서 하는 행동들이겠지만 나는 화가 났다. 밤이 됐으면 집에 틀어박혀 잠이나 잘 것이지 기껏 새 주제에 왜 사람들 일에 신경을 쓰며 수근대는가. 나는 나를 비추는 깨진 거울 같은 새들이 미웠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어린 비둘기에게 벌컥 화를 냈다.
“비켜! 어서!”
새들은 비키기는커녕 친구들을 학대할 수밖에 없는 주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겠다는 듯 펄럭펄럭 다가왔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눈앞의 새를 발로 찬 뒤 돌을 주워 던졌다. 진회색 날개들이 위로 솟구치며 먼지 회오리가 일어났다. 그때 새 한 마리가 풀썩 주저앉았다. 내가 던진 돌에 다리를 다친 것이다. 나는 숨을 삼켰다.
나는 다친 새에게 다가갔다. 새는 충격으로 눈알을 힘겹게 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새들은 물러선 채 일렬횡대로 서서 내 눈치만 봤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 내 모습에 기가 질려버린 듯했다. 그런데도 나는 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사과를 하는 최소한의 성의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약상자를 가져와 머큐롬으로 새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주었다. 나를 버려버리고 싶을 만큼 내가 싫은데도 사과의 말은 나와주지 않았다.
어차피 사는 일이 이토록 복잡하고 너절한 것이라면 사소하고 돌연한 폭력쯤 삭힐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람직하진 않지만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하지 않는가. 나는 그토록 못되고 뻔뻔스러워져 있었다.
*
예상대로 한전 조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그 누가, 어떻게 원인을 밝혀낼 수 있겠는가? 순하긴 해도 반듯하고 의리 있는 은수는 어른들이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내 다그치지 않는 한 실토를 할 아이가 아니었다.
또 꼭 실토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접촉 불량으로 인한 전기 사고야 워낙 흔한 일인데다 불길도 잡혔는데 은수 부모님이 아들이 조사받는 걸 원할 리 없었다. 결국 시월의 네 번째 토요일의 화재 사건은 철없는 한 소년의 위험한 전기 놀이가 원인이라 추정되는 미제 사건으로 종결이 됐다.
그러나 사람들이 화재 사건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었을 때도 내 속에선 지옥이 끓고 있었다. 내 실수라면 실수고 잘못이라면 잘못인 퓨즈 사건을 토미가 그냥 넘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이젠 내가 힘을 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힘을 포기한다 해도 토미는 계속 두려워해야 했다. 나는 굶주린 염치없는 맹수의 아가리 앞에 던져진 불쌍한 초식동물일 뿐이었다.
불안 속에서 살게 되자 마음을 붙일 곳은 역시 비둘기들뿐이었다. 비밀을 털어놓고 하소연할 수 있는 상대가 말 못 하는 새들 외엔 없었다. 나는 나 때문에 다리를 다친 비둘기를 정성껏 돌봐주었다. 굳이 그럴 것까진 없는데도, 하루에 두 번 붕대를 풀고 연고를 발라주고 새 붕대로 싸주었다. 치료 뒤엔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고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서도 사과는 안 했다. 다친 새는 곧 나 자신인데 내가 나에게 사과를 할 필요가 있는가?
그토록 전폭적인 위로를 받고 있으면서도 내 마음은 변함없이 불안했다. 정말 단 하루도 편하질 않았다. 토미가 나와 우리 집 쪽으로 안테나를 곤두세우는 것이, 적군처럼 시시각각 나를 조여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어느 날 환자 비둘기와 놀다 토미의 큼직한 흰 운동화를 봤을 때, 나는 그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자주 두려워하다 보니 헛것까지 보는구나 싶었던 것이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도 그 발들이 그대로 있자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무례하게도 인사도 없이 대문 안으로 쑥 들어온 토미는 창고 앞에 있는 어떤 물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도란스라고 불리는 변압기였다. 일주일 전에 새것과 교체되는 바람에 근처의 전신주에서 내려온 그것은 연휴 때문에 꽤 오래 거기에 있었다. 토미는 긴 갈색 손가락을 들어 도란스를 가리켰다.
“저건 어디에 쓸 거냐?”
“잘 모르겠는데”
“아무리 봐도 괜찮은 고철인데. 덩치도 좋고. 팔면 상당히 받겠다.”
“난 잘 몰라. 이름도 몰라.”
“새끼, 썰렁하기는. 너… 그래도 되는 거냐? 흥, 주제도 모르고.”
녀석은 도란스 쪽으로 침을 캭 뱉고 휘적휘적 떠났다. 그가 사라진 뒤 나는 오랫동안 도란스를 째려봤다. 붉게 녹슨 그 고철 덩어리가 토미라도 되는 것처럼.
그 후에도 직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방치하는 바람에 일주일 더 마당에 있게 된 도란스는 집요하게 내 두려움을 비웃어댔다. 나는 그 고철 덩어리를 치워버리고 싶어 애가 탔다.
다음 날 문식이 그룹과 놀 때 늦게 합류한 은수가 오랜만에 동네에 엿장수가 왔다고 알려주었을 때 비로소 머리가 맑아졌다. 무감각했던 위도 갑자기 허기를 회복했다.
나는 아이들을 몰고 엿장수에게 갔다. 상체에 색색의 띠들을 칭칭 감고 꽹과리를 두드려대며 뻔한 멘트를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그를 보자 토미가 탐냈던 물건을 치워버려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절대로, 토미의 욕망을 채워줄 순 없었다. 나는 눈이 유난히 예리하고 수다스러운 엿장수를 집으로 데려왔다.
도란스 앞에 선 엿장수 총각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실컷 먹여줄 수 있게 된 것도 흐뭇했다.
그러나 엿장수가 엿판을 통째 들어 줘버렸을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들 둘이 들고도 낑낑거려야 하는 엿판의 무게는 바로 내 죄의 무게였기 때문이다. 엿장수가 리어카의 아래쪽 휘장을 들추고 도란스를 넣은 뒤 벗겨진 띠들이 땅에 뒹구는 것도 아랑곳 않고 떠나버렸을 때, 나는 혼자 오돌오돌 떨었다. 꿀벌처럼 엿판으로 달려든 아이들이 엿장수의 가위질 흉내를 내가며 엿을 쪼개 먹다 한 조각을 내 입에 넣어주었을 때도 맛을 느끼지 못했다.
소나기밥만 한 양의 엿을 먹었는데도 우린 3분의 1도 먹지 못했다. 머리를 맞대고 엿판을 감춰둘 장소를 물색하자 괜찮은 답이 나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낑낑거리며 엿판을 들고 집으로 왔다.
먼저 집이 비어 있다는 걸 확인한 뒤 두 아이는 망을 보고 나머지 셋이 엿판을 들고 욕실로 갔다. 일본식 욕실 안쪽에 있는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틀 안엔 큰 무쇠 솥 같은 욕조가 들어 있었다. 솥에 물을 붓고 밖에서 불을 때면 물이 데워지게 돼있는 구조인데 꼭 속옷 빨래처럼 푹푹 삶아질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해 내가 싫어하는 장소였다. 식구들이 때를 벗기는 목욕은 가끔 했기 때문에 평소엔 빨래판과 광주리, 양은대야 따위만 잔뜩 쌓여 있었다.
우리는 그 물건들을 꺼내놓은 뒤 욕조 바닥에 엿판을 놓고 그 위를 비닐로 덮었다. 다시 비닐 위로 허드레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고 나자 기분이 또 달라졌다. 십일월 하순이면 엄마가 겨울 내내 먹을 김치와 연탄을 장만해놓고 온몸에 드러내는 순수한 포만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