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청회색 마당에 내려앉은 우울 ⑤
집에 와 보니 광주 고모 댁에 가 계셨던 할머니가 돌아와 계셨다. 우리 집에서 가장 담담한 사람인 할머니가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집은 차분해져 있었다. 엄마도 아버지도 더 이상 감정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심사숙고를 해봐야 할 때가 됐다고 결론을 내린 듯했다.
그날 밤 열시, 드디어 큰누나의 연인에 대한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짐작대로 낯선 남자는 고단하고 외로운 처지였다.
경기도 수원에서 외아들이자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사춘기 때 어머니가 재혼을 하는 바람에 대학에 갈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다고 했다. 부유한 의붓아버지 덕분에 대학에 입학할 때까진 풍족했는데 그 후 계부의 사업이 기울자 영화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을 해왔다고 했다. 누나가 학창시절 내내 엄마가 부쳐준 돈을 나눠 쓰는 형태로 연인을 보살펴왔으리라는 것쯤은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반 예술가 아내 노릇을 해온 큰누나는 담담했다. 자신이 있어도 식구들의 충격과 걱정을 감안해 죽은 듯이 있어주면 좋을 걸 기어이 눈썹을 치켜뜨고 토를 달았다.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아요.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상처는 영혼의 양식 같은 거잖아요. 자기 상처 없이 어떻게 남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인간을 모르고서 어떻게 예술을 할 수 있겠어요? 우린 너무 젊고,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어요!”
“뭐어야? 말이 청산유수네! 그래, 너 잘났다. 잘났어!”
“그만.”
각자 다른 종류의 열기에 들떠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녀를 보는 할머니의 눈은 한 점의 동요도 없이 고요했다.
“그만 해라. 에미야. 아직 어리고 물정을 몰라 그런다. 앳된 나이에 깎아놓은 밤톨마냥 영악하게 구는 것 보단 예쁘기도 하고. 하지만 수희야, 이 결혼은 안 돼. 네가 데려온 사람은 남편감은 아냐.”
“할머니… 제발.”
“저 죽을 때도 알아차리는 늙은이 눈으로 봐서 아니라면 아닌 거야. 결혼 얘긴, 이쯤에서 접자.”
“싫어요!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어요!”
그때 아버지의 손이 날아가 큰누나의 뺨을 때렸다. 아버지의 꽃이 무참하게 얼룩지는 순간이었다. 때 맞춰 물을 주고 빛 쪽으로 놓아주고 바라만보는 것으로도 행복해하던 순정 하나가 짓밟히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누나는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가족들이 느끼고 있는 고통도 헤치고 나가야만 할 세파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귀를 틀어막은 채 한 말을 하고 또 하는 누나를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 누나가 무언가에 단단히 취해 있는 건 아닐까. 누나는 자신을 열렬하고 비극적인 사랑 영화의 여주인공쯤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여배우를 조종해가며 영화를 찍고 있는 사람은 우리 가족에게 지옥을 떨어뜨려놓고 떠나버린 낯선 남자였다.
이미 누나가 영화 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현실의 법칙과 규율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건 훤했다. 세 어른의 한숨이 이산화탄소처럼 집안을 채웠다.
뜻밖에도 할머니는 완강했다. 화를 내는 속도만큼 상황 판단도 결론도 빠른 엄마는 일주일이 지나자 짜증도 못 낼 만큼 지쳐버렸지만 할머니는 갈수록 단호해졌다.
“길이 아니면 첨부터 가지 말아야 해. 수희 포기 시켜라. 지금은 펄펄 뛰어도 나중엔 너보고 고맙다고 할 거다.”
“어머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미 둘이 많이 가까워져 버린 것 같은데.”
엄마는 말꼬리를 흐렸지만 나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지방 출신의 남녀가 부모의 통제 없이 만나며 급속도로 가까워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된 경우임이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최초의 난리가 발생한 순간부터 함평읍 안에 소문이 산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낯선 남자보다는 누나에게 열 배쯤 불리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모를 리 없는 할머니가 완강하게 버틸 때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할머니는 아버지가 폐렴을 앓았을 때 못지않게 완강했다.
“그깟 남의 말이 뭐가 중요해? 사람들? 한 사흘 떠들고 나면 다 수그러든다. 나중엔 떠들라고 해도 안 해. 그리고 정 신경 쓰이면 이곳을 뜨면 될 거 아니냐?”
“어머니!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예요?”
“하면 하지 왜 못해?”
“아, 수희 애비가 여기 있으니까 모두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으니.”
“그게 누구 탓인지 생각해봤어? 이게 다 니가 첫날 울고불고 난리를 친 덕분 아니냐? 지금껏 단 한 번이라도 울면 어찌 될지 생각해보고 울어봤어? 자식 일에도 그렇게 생각이 없어? 생각 없이 굴면 볍씨만 한 일도 훨훨 타는 지옥불이 돼!”
그때 문득 이런 의심이 생겼다. 낯선 남자가 이 모든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걸 모르고서야 그토록 여유작작할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낯선 남자가 시종일관 내뿜던 우수도 진짜 우수가 아니었을 수 있다. 그것은 그냥 우수를 가장한 세련된 허세가 아니었을까. 나는 며칠째 우리 가족을 들었다 놨다 하며 골탕 먹이고 있는 낯선 남자가 괘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