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청회색 마당에 내려앉은 우울 ④
사흘 후 나는 학교 뒤쪽의 토끼 사육장 앞에서 내가 아플 때 문식이를 따라 병문안을 와주었던 다섯 아이들을 만났다. 토끼 오줌 냄새와 풀 향기가 뒤섞인 시큼털털한 냄새 속에서 한때 부하였던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시큰했다. 아이들도 내가 전처럼 건강해 보이고 또 저희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좋은지 밝게 웃었다.
농담과 잡담으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나는 책가방에서 훔친 스패너형 퓨즈들을 꺼내 하나씩 나눠주었다. 마침 철사형이 떨어져 스패너형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들이 그것의 특별한 모양에 흥분하는 걸 보자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으로 느껴졌다. 나는 준비해온 의젓한 멘트도 잊지 않았다.
“부모님께 갖다 드려. 어떤 분도 싫어하진 않으실 거다.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
아이들이 화창하게 웃었다. 예전에 시시한 장난감을 받을 때와는 다른 감탄, 의기양양함이 그 얼굴들에 가득했다. 어느새 녀석들은 생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아는 나이가 된 것이다. 허황된 미국 영화를 보며 마냥 행복해하던 그때 그 꼬마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나는? 나는 아이들이 받아줄 만한 물건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들과 행복하게 지내던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부하들의 흔쾌한 합의와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해내기 위해 바지런히 일하던 순간의 충만감도 그리웠다. 정말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악마가 나를 통해 속삭이고 있었다.
“앞으로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 얼마든지 갖다 줄 수 있으니까.”
아이들이 다시 환하게 웃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새롭게 발견한 아이들의 장점들을 칭찬해주었다. 심사숙고해 입에 올린 표현인 만큼 황당하진 않으면서 들으면 행복해지며 제 가능성을 믿게 해주는 단어들을 아이들이 빨아들이는 걸 보자 뿌듯했다. 역시 칭찬을 통한 지배는 산뜻해서 좋았다. 나는 오는 내내 입안에서 굴려봤던 말을 내보냈다.
“우리 날 잡아서 축구나 한번 할까? 수가 좀 모자라지만 그건 너희가 몇 명 데려오면 되는 거고.”
그때 문식이가 냉큼 나서서 나를 거들었다.
“종수는 이번 주 토요일에 아버지 따라 여수 친척집에 간대.”
뜻밖에도 아이들은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종수가 그렇게 힘이 셌던가? 아이들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그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릴 만큼. 그때, 내 옆에 있던 문식이가 왼쪽으로 돌아서며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거렸다.
“개애… 새끼.”
문식이의 등 쪽을 보니 나보다 키가 십오 센티미터는 더 커 보이는 토미가 축축한 벽처럼 서 있었다. 더러운 유리창같이 불투명한 녀석은 약간 튀어나온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누군가를 비웃고 있었다. 그는 내 앞을 막아섰다.
“저 퓨즈들, 느이 아버지 꺼냐? 아님 한전 꺼냐?”
“무, 물론 아, 아버지가 주셨지.”
“허, 놀러 나가 애들 하나씩 나눠주라고? 그으짓말. 이게 날 뭘로 보고.”
토미는 오른쪽 주먹을 내 코앞에 갖다 댔다. 움켜쥔 주먹의 검지와 중지 사이로 엄지의 윗부분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미국 영화를 많이 본 나는 그것이 상대를 무시하고 모욕할 때 쓰는 사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도 두려움이 분노보다 커 보일까봐 걱정이 됐다.
다음엔 치떨리는 수치심이 몰려왔다. 나는 눈에 핏발이 서도록 힘을 줬다. 외롭고 서늘한 분위기는 간데없고 낡은 가죽같이 질기고 탁하고 능글맞은 기운이 토미를 뒤덮고 있었다. 내 감정이 실망 쪽에 가깝다는 걸 알자 녀석은 움찔했다. 엉겁결에 상대의 아킬레스건을 발견한 내가 제법 호전적인 눈길을 던지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거… 남은 거 있냐?”
나는 점퍼 호주머니에서 남은 퓨즈를 주섬주섬 꺼내 녀석에게 주었다. 그는 그걸 치켜들고 샅샅이 보더니 갑자기 바닥에 던졌다.
“주워!”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명령을 따를 순 없어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때 고맙게도 문식이가 퓨즈를 주워 토미에게 건넸다. 다행히 토미는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순순히 퓨즈를 받아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다. 아이들이 흩어졌다. 토미도 돌아서서 휘적휘적 걸어가며 한 손을 들었다.
“나 간다. 앞으로 자주 보자.”
얼마나 입술을 세게 깨물었는지 바닥에 침을 뱉자 핏물이 섞여 나왔다. 눈치 빠른 문식이는 내가 하고 싶은 욕을 대신 해주었다.
“으휴, 저런 그지 같은 깜둥이 새끼를.”
“왜? 얘들을 패기라도 하냐?”
“아, 아아니. 깜둥이한테 맞고 다니는 걸 두고 볼 부모가 이 함평에 어딨냐?”
“그럼 왜?”
“편하게 놀아주는 상대가 없으니까 함평 중학 불량배들과 어울려. 거기선 따까리 노릇이나 하는 주제에 국민학교에 와선 깡패 행세를 한다 이거지. 그런데 그게 말야, 대장. 제가 어울리는 불량배들에게 우릴 손봐달라고 부탁하면 대책이 없더라구. 실제로 종수도 그런 식으로 위협해온 것 같아.”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 함평 아이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무시하는 이방인이라면 그런 전략을 써볼 수 있겠구나, 아니 그것밖에 없겠구나. 맥이 쑥 빠지며 얼얼했다.
내가 없는 사이 그토록 많은 일이 있었다니. 녀석이 학교에 편입해 들어오고 본격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그걸 알아보고 접근한 중학교 불량배들의 먹이 겸 장난감이 되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여전히 그의 힘과 억눌린 에너지를 두려워하고….
녀석은 친부모는 몰라도 양부는 잘 만난 것 같았다. 제때 학업을 시작하지 않아 공부를 잘할 가능성이라곤 없는 양아들에게 운동을 시켜 힘을 과시하게 한 뒤 내보냄으로써 경멸받는 것만은 막아보려 한 허 관장의 작전은 유효했다. 실제로 뒤에선 토미를 무시하며 흉을 보던 아이들도 막상 그를 보면 겁을 먹고 갈팡질팡하지 않는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암담했다. 아무래도 함평에서의 내 지배의 운은 수명을 다한 걸까? 화려한 날들은 다시 올 수 없는 걸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나는 자문해봤다. 나는 왜 다시 뻔한 수렁 속으로 발을 내디디려 하는가? 내가 힘을 쫓지 않으면 토미도 내게 힘을 행사할 수 없는데. 그림자란 그림자는 다 지워질 만큼 환한 대낮에 나는 혼자 눈앞이 캄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