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청회색 마당에 내려앉은 우울 ③
이틀 후 점심시간에 학교 놀이터에서 우연히 문식이를 만났다. 하나는 늑목 안에 또 하나는 철봉에 매달려 있다 눈이 마주쳤는데, 거꾸로 매달린 상태여서 더 우스워 보이는 그가 활짝 웃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녀석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팔굽혀펴기를 열 번 한 뒤 가뿐히 착지했다. 녀석은 강아지처럼 늑목 쪽으로 쪼르르 왔다.
“대장. 전에 대장이 줬던 퓨즈 말야. 마침 그날 저녁 우리 집 안방 퓨즈가 나가버렸거든. 다른 때 같으면 새 퓨즈 사 와라, 누가 갈래? 난 싫다, 하며 실랑이를 했을 텐데 그날은 간단히 집이 환해졌어. 아버지도 전에 쓰던 것 보다 훨씬 좋다고 하시더라.”
“다행이네. 더 필요하면 말해. 몇 개 더 갖다줄 수도 있어.”
“정말?”
“그러엄.”
“아, 대장. 우리 아버지가 대장한테 강아지 주는 것 허락하셨다.”
“정말?”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가자. 오늘 당장 갖고 가도 돼.”
방과 후에 우리는 문식이 집으로 갔다. 따끈따끈한 부엌방 아랫목에서 졸고 있는 어미 진돗개와 다섯 마리의 새끼들을 보자 다시 옛날처럼 가슴이 뛰었다. 비둘기들을 키우느라 개는 키워볼 엄두도 못 내는 우리 집에선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닌 것이다.
잠시 후 어미 개가 잠이 들자 문식이가 눈만 겨우 떴을 뿐 털도 채 나지 않은 살굿빛 강아지 한 마리를 내게 안겨주었다. 새끼 비둘기를 안았을 때와는 또 다른 풍성함과 튕기는 기미라곤 없이 상대를 흡수해버리는 적극성은 여전히 짜릿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자 정신이 돌아왔다. 요즘처럼 우울하고 어수선한 때에 강아지를 집에 데려가는 건 미친 짓이었다. 엄마는 나의 무신경함과 욕심을 맹렬히 비난한 뒤 당장 돌려주고 오라고 명령할 것이다. 나는 결론을 냈다.
“한동안, 아니 잠깐만 니가 키워주라. 내가 나중에 데려갈게.”
“그래? 아, 알았어. 근데… 왜?”
“그냥 그렇게 해줘. 꼭 데려갈 테니까.”
문식이는 나를 바래다주기 위해 따라 나왔다.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녀석의 집과 우리 집의 중간 지점까지 왔을 때 나는 대뜸 녀석에게 물었다.
“종수 녀석, 어때?”
“무슨 뜻이야?”
“종수와 아이들과의 관계가 어떠냐고?”
“글쎄. 크게 나쁠 거야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지. 아, 녀석이 워낙 지랄 같은 데가 있잖아. 종잡을 수도 없고, 또 손버릇도 나쁘고. 걔 밑에선 주먹 약하고 마음 약한 놈들은 고생 좀 하게 돼 있지.”
“그럼 아이들이 많이 싫어하겠네.”
“… 그게 말야.”
문식이는 당황했다. 나는 많이 실망했지만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잠시 후 문식이의 얼굴도 평온해졌다.
“뭐, 속으론 그럴 수도 있겠지.”
예상과 달리 말을 얼버무리는 문식이를 보자 마음이 착잡했다. 처음엔 아이들이 종수의 물량 공세에 길들여져 버렸구나, 싶었는데 곧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 굳이 찾아내고자 하면 종수에게도 매력은 있었다. 허술하다면 허술하고 소탈하다면 소탈한 녀석의 솔직함은 그를 너무 무시하지만 않으면 인간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특징이었다.
또 종수의 스타일의 장점들 중 하나는 약점을 보여도 상대가 쉽게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나아질 여지가 많은 타입이었다.
반면 나처럼 생각이 깊어 보이고 또 실제로 깊은 사람은 약점을 들키면 치명적인 결과가 생긴다. 그럴듯한 첫 인상도 길게 보면 도움이 안 된다. 시간이 갈수록 얼마쯤 실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종수는 어떤 관점에서 봐도 짜증나는 녀석이었다.
나는 내 말투가 문식이의 자존심을 건드려주길 바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얘들은 녀석에게 불만이 없는 거네.”
“그건 아니지. 그냥 얘들이 녀석을 잘 알고 있다는 거지. 왜? 이번이 두 번째잖아. 하지만 어디 대장하고 잘 지내던 시절에 비하겠어? 일단 새끼가 대장 같지가 않잖아? 품위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아무리 놀며 만나는 사이라지만 대장이면 배울 게 있어야 하는데. 어휴, 가끔은 그런 새끼 밑에 있다는 게 쪽팔려서….”
끝없이 이어지는 문식이의 불만을 들으며 내 마음은 안정되어갔다. 나중엔 종수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흥, 바보 같은 놈. 누군 할 일이 없어 가오 잡는 데 시간과 돈, 힘을 들이는 줄 알아? 그것도 먹고 입고 자는 것 못지않은 기본이거든.’
결국 결론은 이랬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나쁜 상황도 아니었다. 내 경우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빠른 균열이긴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움직여도 좋은 때는 아니었다.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생각해보라. 무수히 금이 간 담벼락은 세지 않은 주먹 한 방으로도 간단히 무너진다. 그러나 금이 없거나 조금 있는 벽을 때려봤자 내 주먹만 피를 흘릴 뿐이다. 지금은 나의 회복과 부활의 증거들을 보여주고 나와 함께 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 정도로 충분했다. 나는 문식이 쪽으로 돌아섰다.
“사흘 뒤에 우리가 전에 모이던 토끼 사육장 앞으로 얘들을 데리고 나와. 한 대여섯 명쯤.”
“왜?”
“왜는 왜야? 대장이 선물을 주고 싶어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