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청회색 마당에 내려앉은 우울 ②
나는 일 년 전과 너무 달라진 누나가 낯설어 샅샅이 훑어봤다. 누나는 변해 있었다. 그녀를 감싼 처녀만의 정결하고 신비한 광휘가 사라지고 없었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친 것일까. 화려하지만 세련된 화장을 하고 몸에 착 붙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어 영화배우처럼 보이는 누나는 누가 보더라도 공부 보다 연애에 열중해온 티가 역력했다.
그때 이틀 전 광주로 출장을 떠났던 아버지가 빨간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무실을 거치지 않고 와서 사전 정보를 못 들었는지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낯선 젊은 남자를 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복잡했다. 여행의 피로에 찌든 그의 얼굴을 스쳐가는 감정들을 나는 당혹감과 배신감, 의문으로 읽었다.
대학을 졸업한 맏딸이 교사 생활을 하다 미모와 학벌에 걸맞은 유능하고 건실한 남자와 중매결혼을 해야 한다는 그의 비전에 비춰볼 때 오늘의 풍경은 결코 있어선 안 될 풍경이었다. 게다가 큰누나는 아버지가 마음의 연인으로 삼아온 단 하나뿐인 이상적인 여인이 아니던가?
안방으로 들어온 뒤에도 아버지는 불쾌한 불청객인 ‘낯선 젊은 놈’의 얼굴을 집어삼킬 듯이 봤다. 신기한 건 그가 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누나가 어느 때보다 당당하다는 것이었다.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가장 힘이 센 사람은 낯선 남자고 두 번째는 누나고 세 번째가 아버지인 듯했다. 연애의 경위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를 한 누나는 당돌하게도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
“아버지. 이 사람은 저를 필요로 해요. 아니 제가 이 사람을 많이 사랑해요.”
누나의 눈과 똑같이 생긴 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그 눈은 누나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나의 눈엔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누나가 모든 감각을 동원해 신경을 쓰는 사람은 딱 하나, 애인뿐이었다. 누나는 남자의 손을 찾아 꼭 쥐었다.
“학교를 휴학…. 아니 그만두고 이 사람과 결혼하겠어요!”
폐쇄된 우물 같은 아버지의 눈이 불꽃으로 변했다. 아버지의 손등 위의 푸른 정맥들이 힘센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 주먹보다 먼저 누나의 얼굴로 날아간 건 엄마의 손이었다.
“뭐? 학교를 그만둬?”
누나의 얼굴이 훽 돌아갈 만큼 거센 따귀였다. 누나의 긴 갈색머리 위에 살포시 얹어진 화려한 나비 핀이 풀어지며 구불구불한 머리카락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누나의 머리와 등을 계속 때렸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이 못된 것. 이 웬수! 내 오늘 널.”
“그만, 그만 해! 다 큰 애를….”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빨았다. 담배를 빨 때마다 목젖이 떨렸다. 아버지는 불을 삼키듯이 빨던 담배를 껐다.
“안 된다. 학교를 그만두는 건 절대 안 돼. 그리고….”
“….”
“결혼도 허락할 수 없어.”
아버지는 낯선 남자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러나 그의 입에선 그가 탈진해버렸음을 알게 해주는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난 아직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그런데 불쑥 찾아와 그런 엄청난 말을 하면 안 되지. 식구들이 아무리 깊이 생각하고 또 오래 얘기를 해도 결론을 낼 수 있는 일이 아냐. 오늘은 그냥 올라가게.”
낯선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표정도 여전히 담담했다. 그가 결혼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단지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긴장해 두 사람을 지켜보던 큰누나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커플 중 상대에게 더 집착하는 사람은 누나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정경이었다. 낯선 남자는, 결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뭐랄까, 누나의 감정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건 상대의 감정이 자신의 감정보다 진하다는 걸 알 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사랑에 대해선 모르지만 연인들 간에도 관철되는 힘의 법칙만큼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석양 무렵 낯선 남자는 밤차를 타고 상경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안절부절 못하고 마당을 서성대던 누나가 열지도 않은 가방을 챙겨 들고 따라나섰다. 박해자의 소굴에서 탈출하는 순교자라도 된 듯 호들갑을 떠는 누나를 지켜보던 엄마의 큰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엄마는 누나 앞으로 달려갔다.
“너, 지금 어디 가냐?”
“….”
“학교도 안 다니겠다는 애가 서울은 왜 가? 서울 가서 뭐 하려고? 공부하기 싫음 집에서 살림이나 거들어.”
그래도 누나는 쭈뼛거리기만 할 뿐 돌아서지 않았다. 누나는 간절한 눈으로 대문을 등지고 선 남자를 봤지만 그는 먼 산만 그윽하게 봤다. 결국 누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엄마의 눈에 안도감과 빈정거림이 꽉 찼다. 엄마는 팔짱을 낀 채 날렵한 하이힐 속에 담긴 누나의 두 발을 노려봤다.
“대문 밖으로 한 발짝만 나서봐. 한 푼도 보내주지 않을 테니까.”
그제야 누나는 가방을 팽개치고 주저앉았다. 누나는 어린애처럼 두 발을 뻗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울음은 통곡으로 변했다. 나는 생각보다 대단치 않은 사랑의 힘에 실망했다. 누나의 남자 보는 눈엔 실망을 했으면서도 이왕 선택한 이상 꿋꿋이 버티고 싸워 사랑이란 것의 진수를 보여주길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남자가 혼자 떠난 뒤 엄마는 누나를 마당 한쪽으로 끌고 가 사정없이 팼다. 이번엔 아버지도 말리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다. 엄마는 할 줄 아는 욕 몇 개를 하고 또 하며 누나의 머리와 어깨, 등을 주먹으로 계속 쳤다. 그런데도 누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심한 매질쯤이야 예상했다는 듯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 몸짓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사랑을 위해 이쯤은 각오하고 있었어요. 난, 더한 것도 참을 수 있어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둘째누나와 막내누나, 그리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화신이었던 큰누나가 망가져가는 걸 지켜봤다. 뜻밖에도 그 모습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아, 아름다움과 우아함조차 헌신짝같이 내던지게 하는 게 사랑이구나, 하는 숭고한 깨달음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린 나조차도 우리가 원하는 것과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다를 땐 쥐 죽은 듯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구경꾼 노릇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