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청회색 마당에 내려앉은 우울 ①
추석 연휴가 끝나고 첫 등교를 한 날이었다. 종례가 끝난 뒤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털레털레 걸어 나오는데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러세웠다.
“박수형”
나는 돌아섰다.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친구처럼 지내줄 줄도 아는 노총각 선생님이 교실 문턱에 서서 웃고 계셨다.
“선생님이 부탁할 게 있어서. 혹시 수형이 집에 출장소에서 쓰고 남은 퓨즈 있을까? 선생님 하숙방 퓨즈가 나가버렸거든. 전파사에선 광주로 주문한 부품들이 오는데 이삼 일은 걸릴 거라고 하네.”
나는 선생님의 부탁이 눈물겹게 반가웠다. 몸과 마음이 찐빵 반죽처럼 부풀어 오르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차렷 자세를 하고 최대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반드시 찾아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출장소 창고로 가 퓨즈를 찾아봤다. 다행히 퓨즈는 많았다. 또 종류도 두 가지나 됐다. 굴대에 돌돌 말려 있는 철사형 퓨즈와 큼직한 열쇠 같은 스패너형 퓨즈. 두 번째 것이 한결 근사해 보였지만 선생님이 무엇을 더 좋아하실지 알 수 없어서 두 가지 모두를 책가방에 넣어두었다.
다음 날 종례가 끝난 뒤 나는 선생님을 따라 나갔다. 선생님이 교무실 문을 연 순간 나는 얼른 그 앞으로 가서 선물을 내밀었다.
“야, 우리 수형이가 선생님 부탁을 잊지 않았구나. 고맙다.”
선생님은 섬약한 얼굴과는 딴판으로 생긴 투박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 순간 내 마음은 허공으로 풀린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칭찬을 들어본 지 너무 오래됐다고나 할까. 심장을 포함한 내장들이 선생님의 칭찬을 밥이나 물처럼 살뜰히 씹어 삼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흥분해버린 나는 큰 소리를 냈다.
“선생님. 우리 집 창고엔 쓰지 않는 퓨즈들이 많습니다.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언제든지, 얼마든지 갖다드리겠습니다.”
교무실 안의 선생님들이 나를 쳐다봤다. 놀라움 반 호기심 반인 표정들이었다. 이토록 많은 관심을 받게 될 줄은 몰랐던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 한 선생님이 보고 있던 서류로 눈길을 돌리며 빙긋이 웃었다.
“그럼 나도 하나 갖다줘보렴.”
그러자 다른 선생님들도 따라서 나도, 나도, 하고 말했다. 잠시 후 선생님들은 마주보고 껄껄껄 웃었다. 처음엔 나는 그들이 나를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 다른 생각이 날 덮쳤다. 담임선생님도 어제 나에게 퓨즈를 갖다달라고 부탁하셨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른 선생님들도 질 좋은 전기용품이 하나 생겼으면, 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이다. 함평은 도시와 비교하면 외진 공간이었고, 누구에게든 질 좋은 전기 부품은 성의 있는 선물이 될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는 방과 후에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들께 퓨즈를 하나씩 나눠드렸다. 각자의 용도를 고려해 철사형과 스패너형을 반반씩 섞어놓은 사려 깊은 선물이었다. 한동안 선생님들은 마주보며 수런거렸다.
“이거 두 가지가 모양이 완전히 다르네. 어떤 게 가정용이지?”
“당연히 작은 거겠지.”
“그럼 큰 건?”
“공장용 아닌가? 가정용 아님 공장용이지. 안 그래?”
“설마”
“그만들 하십시오. 얘가 뭘 자세히 알고 가져왔겠어요?”
내가 이학년 때 담임이셨던 정 선생님이 눈짓과 말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간단히 정리해버렸다. 정 선생님은 눈사람처럼 언 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셨다.
“고맙다. 그래도 선생님들을 생각해주는 사람은 우리 수형이뿐이구나.”
선생님들이 다시 껄껄껄 웃었다. 잠시 후 선생님들은 모두 하던 일로 되돌아갔다. 갑자기 사람들이 내게 무관심해지자 또 불편해졌다. 산소 부족 증상인 듯 목이 칼칼해지더니 호흡곤란 증세마저 나타났다. 나는 차려 자세를 하고 눈을 꽉 감았다.
“퓨즈는 저희 아버지께서 보내신 선물이었습니다!”
민망해서 눈도 못 뜨는 나의 귓속으로 선생님들의 폭소가 파고들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선생님들은 계속 크게 웃었다. 일 년치 웃음을 한꺼번에 내보내는 것 같았다. 반응이 너무 격렬하자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반항심이 생겼다. 삐딱한 말이라도 해보려고 할 때 내 옆의 늙은 남자 선생님이 내 엉덩이를 탁, 쳤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이젠 가봐.”
교무실 앞 복도에서 신발을 신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책가방을 옆구리에 낀 문식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사학년 때 처음으로 다른 반이 된 녀석은 내가 투병에 집중하느라 저를 잊고 있던 사이 뚱뚱해져 있었다. 개성이 강한 네모난 얼굴이 나를 가까이서 보자 내부의 스위치라도 켠 듯 환해졌다.
“어, 대장. 교무실엔 어인 일?”
“응. 선생님들께 갖다드릴 물건이 있었어.”
오랜만에 들어보는 대장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나를 보자마자 튀어나온 걸 보면 녀석의 머리속에선 내가 죽 대장으로 살아온 듯했다. 녀석은 내가 건강했을 땐 충실한 오른 팔이었고 병에 걸렸을 땐 절친했던 아이들을 데리고 병문안을 와준 진짜 친구였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딱 하나, 녀석을 진정한 부하로 알고 챙겨주는 것일 것이다. 나는 책가방에서 철사형 퓨즈 하나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이거 부모님께 갖다 드려. 시골집에서 쓰는 전기 부품들은 질이 별로야. 집의 퓨즈가 고장 나면 이걸로 바꿔라. 전파사에서 사서 쓰는 것보다 좋을 거야.”
“와,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다. 근데 대장. 진짜 얼굴 좋아졌다. 이제 다 나은 거야?”
“그럼.”
“언제 한번 제대로 뭉쳐야겠네.”
“그러든지”
“아이들 만나서 시간을 잡아볼게. 근데 대장, 나 지금은 가봐야 해.”
“왜?”
“오늘 우리 집 영롱이가 새끼를 낳을 것 같애. 오후 네시에 산파 아저씨들이 집에 오실 거야. 이번엔 아버지에게 미리 얘기해서 진짜 한 마리 줄게.”
“정말?”
“그러엄!”
문식이는 두 팔을 미풍 속의 깃발처럼 흔들며 멀어져갔다. 녀석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도 유난히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그의 각진 얼굴은 오래 남아 내 마음을 흔들어댔다. 또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몇 번이고 튀어나오던 대장이라는 단어도 내 머릿속에 각인됐다.
버섯처럼 창백했던 나는 혈관 가득 열기가 번져가는 걸 느끼며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펌프가로 가 푸아푸아 세수를 했다. 눈을 부릅뜨고 물속을 들여다봤다. 희고 갸름한 소년의 얼굴이 덩그렇게 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말 문식이 말처럼 내 얼굴의 특징들 중 하나인 장밋빛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최근에 몸이 완전히 좋아졌다고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대야를 짚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얼굴이 또렷해졌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내 존재까지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일상적으로 느낀, 세상으로부터 물러서 있는 듯한 느낌이 아니었다. 어느새 철없는 소년의 원기 왕성한 일상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욕망으로 이어졌다. 나는 나이고 싶다. 내 것을 갖고 싶다. 그리고 전보다 나아지고 싶다. 나는 거칠게 물을 휘저으며 다시 세수를 했다. 결이 뻣뻣한 수건으로 얼굴을 북북 문지르며, 나는 결심했다. 우선 나를 따르던 놈들부터 되찾아야겠다고. 병을 앓는 동안 어떤 아이도 끝까지 내 편이 돼줄 수 없다는 걸, 어떤 힘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절감했지만 그따위 감정에 빠져 머뭇거리다간 정말 끝장이었다. 개미처럼 살아 꾸물거리는 자들의 대열에서 영영 밀려나고 마는 것이다.
*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여름방학 때도 오지 않았던 큰누나가 와 있었다. 도착한 지 얼마 안됐는지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큰누나 옆엔 뜻밖에도 한 남자가 있었다. 섬세하고 준수한 흰 얼굴도 눈길을 끌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그의 옷차림이었다.
광택이 도는 회색 재킷 안에 파란 실크 셔츠를 받쳐 입고 흰 바지를 입고 백구두까지 신은 그는 자유분방함 그 자체로 보였다. 앞뒤좌우 어디에서 봐도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은 아니었다. 큰누나는 촌뜨기마냥 굳은 채 차려 자세를 하고 있는 동생들 앞으로 남자를 떠밀었다.
“내가 삼 년째 활동하고 있는 연극 서클의 선배셔. K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시란다. 이미 연기와 연출에서 상당히 인정을 받으신 분이지. 첫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 소울메이트라는 걸 알아봤어. 번개를 맞듯이 말야. 아, 나이도 궁금하지? 누나랑은 두 살 차이야.”
그때서야 우리는 남자가 애인의 집에 자신을 선보이러 온 남자라는 걸 알았다. 솔직히 말해, 그조차도 놀라웠다. 긴장한 채 일렬로 늘어서 있는 애인의 동생들 앞에서도 별로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색함과 오만이 반반인 그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지? 이런 게 사랑과 무슨 상관이 있다구? 내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해. 역시 산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야.’
더 황당하고 웃기는 건 그 옆에 다소곳하게 서있는 큰 누나의 표정이었다.
‘괴롭죠? 답답하죠? 이해해요. 하지만 조금만 참아줘요. 제발, 나를 봐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