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 그레이스 ! ②
넉 달 후인 시월 중순, 나는 열한 번째 생일을 맞았다. 긴 투병 생활의 끄트머리에 맞은 그 생일은 특별했다. 여전히 내가 새파랗게 살아 있는 것에 대해 감격하고 새삼 결의도 하게 되고 했지만 내가 그날을 기억하는 건 그 때문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 뒤 초희 누나가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콜롬방 병원에서 병이 나았다는 진단을 받은 것과 동시에 심신을 앓아가며 한 짝사랑이 허망하게 끝난 지 꼭 일주일만이었다.
사흘 전 우리 가족은 외할아버지 칠순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외가로 갔다. 아버지는 초희 누나에게 함께 가자고 했지만 누나는 자신이 갈 곳이 아니라고, 집에 남아 있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일정 보다 하루 늦게 돌아온 식구들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맞닥뜨린 건 정적이었다. 식구들은 긴장했다. 정적이야말로 우리 집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집의 또 다른 주인인 비둘기들이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초희 누나를 불렀다. 네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누나 방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엄마가 더 참지 못하고 달려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예상대로 방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한눈에도 초희 누나와 아이의 짐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누나가 책상 겸용으로 쓰던 작은 서랍장 위에 얌전히 놓인 흰 봉투를 가져와 할머니에게 드렸다. 종이처럼 바삭해진 할머니는 한쪽 팔만 절망적으로 내저었다. 편지를 읽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봉투를 준 뒤에도 계속 흔들거리는 그 팔은 할머니의 몸 같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꺼내 읽은 뒤 땅에 떨어뜨렸다. 엄마가 그걸 주워 읽었고, 다음엔 나와 누나들이 달라붙었다.
‘키워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젠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반이 잡히면 연락하겠습니다.’
짧지만 글자 하나하나가 못처럼 가슴을 찔러대는, 말과 말 사이에 더 많은 말들이 숨어 있는 편지였다. 식구들은 무너지듯 집 곳곳에 주저앉았다. 나는 눈치 빠른 아이답게 내가 누나의 가출의 직접적인 원인일 거라고 짐작했다. 식구들이 나의 병치레에 매달려 있는 동안 역시 눈치가 백단인 누나는 이 집이 자신과 아이가 머물 곳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가출은 그 전부터 계획된 것일 것이다. 누나는 단지 조금 더 생각해보기 위해, 떠나갈 곳을 확실히 정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을 것이다. 맞다. 그렇다면 이 느닷없고 잔인한 이별은 운명처럼 예정된 것인가.
운명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이젠 나도 그것이 사람의 힘으론 어찌해볼 수 없는 인생의 밑그림이라는 것쯤은 안다.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엄마는 밥 지을 쌀을 퍼올 때 쓰는 큰 바가지를 들고 창고로 들어갔다.
“어휴, 이게 팔자인가 봐. 어른들이 팔자팔자 할 땐 다 열심히 안 살아놓고 변명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네. 이건 뭐야? 도망가려 하면 할수록 더 심하게 다치기만 하잖아!”
엄마가 바가지로 쌀독 안을 박박 긁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엄마가 바가지를 거칠게 창고 바닥에 팽개치는 소리도 들렸다.
“그렇다면, 태어나기 전에 팔잘 고르는 제비뽑길 할 때 그때 잘 해야 하는 거네. 뭐야, 그럼 인생이 너무 시시하잖아…. 어휴, 정말 어떻게 사나? 그 어린 걸 데리고.”
엄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세련되고 우아한 감각을 가진 초희 누나가 기술까지 늘어 최상품 스웨터를 짤 줄 알게 된 시점은 공장에서 기계로 더 얇고 실용적인 스웨터를 생산하게 된 때와 일치했다.
시골에서 어린 처녀들이 편물 공장으로 돈을 벌러 떠나는 모습은 보기 드문 풍경이 아니었다. 비록 그 처녀들이 짠 편물이 아직은 생산량이 많지 않아 비싸지만 점점 공장이 늘어나 공급이 많아지면 값이 싸질 거라고 했다. 그러면 가격을 내리는데 한계가 있는 수제 편물은 설 자리를 잃을 거라고 했다.
그것은 곧 편물이 이른바 끝물에 접어들었고 초희 누나가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는 상황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뜻했다.
엄마의 넋두리가 길어지는데도 아버지는 침묵했다. 평소같이 눈살을 찌푸리지도 혀를 차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아예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했다. 그러나 밀랍 가면 같은 얼굴 너머로 무언가가 서걱서걱 무너져 내리는 것만은 또렷이 보였다. 단지 주저앉는 것만은 피해보려고 이를 악물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후 쌀이 담긴 바가지를 든 엄마가 창고에서 나왔다. 부엌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 엄마의 눈이 붉었다. 창고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울었을 거라고 짐작하게 하는 눈이었다.
돌아온 초희 누나를 따뜻이 대해주지 못했으면서도 떠나버린 지금은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고 가엾기만 한 것. 그 복잡함이 엄마의 고통의 특징인 듯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초희 누나의 시댁에 전화를 걸어 죽은 매형의 형과 통화를 했다. 나는 날벌레처럼 아버지에게 붙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수씨요? 이틀 전에 왔습디다. 대구로 간다고 하더군요.”
“그걸…. 그냥 보내셨습니까?”
“어떻게 잡습니까? 서른도 못된 새파란 사람을. 서른다섯만 됐어도 붙들었을 겁니다.”
“아이는…. 데려갔지요?”
“맡기고 갔습니다. 기반을 잡으면 데려가겠다고 하더군요.”
식구들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아이와 누나를 분리시켜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이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나는 지금껏 제 인생을 망가뜨린 장본인이 어머니라며 백모를 증오해왔지만 지금 누나의 행위는 백모와 똑같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전부를 걸지 않고 유령처럼 떠돌게 하는 나쁜 운명이 초희 누나를 뱀처럼 휘감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누나가 불치병 환자처럼 가엾고 무서워졌다.
그날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의사의 경고를 받고도 끊지 못한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마당의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어둠 속에 애잔하게 떠 있는, 죽음을 준비하느라 수척해진 꽃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고요했다. 그를 안은 바위 위에 얹어진 또 하나의 바위처럼.
그때 지난 추석에 한 친척 어른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아버지의 삶에 대해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네 아버지는 말 그대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란다. 함평군에서도 가장 외진 마을의 빈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네 아버지는 열 살 때 부친을 잃자 돈을 벌겠다고 무작정 서울로 갔지. 온갖 잡일을 하며 고생하다 열다섯 살 때 인천항에서 연락선을 숨어 타고 일본으로 갔어. 도쿄에서 대형서점의 사환으로 일했는데 주인이 영리하고 부지런한 그를 잘 봐 삼 년째 되던 해에 야간학교에 보내주었다지 뭐냐? 나중엔 고학을 해가며 와세다 대학 부설 전기 학교까지 졸업했지. 어떤 사람은 운이 좋다고 하더라만, 네 아버지도 대단했던 거지.”
그 후의 아버지의 삶에 관한 얘기는 나도 알고 있다. 스물일곱 살에 귀국한 아버지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직장이었던 남선 전기 회사에 취직을 했다. 일 년 후엔 양반의 후예인 윤씨 집안의 고명딸인 엄마와 중매결혼을 했다. 그때 아버지는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집안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훨씬 나빠졌다. 열이 넘는 아이들을 낳아 반은 죽고 반은 키운다는 다른 집과 달리 손이 유독 귀한 집안에서 백부와 당숙들이 차례로 죽어 나간 것이다. 그 후 아버지는 백모에게도 당숙모들에게도 매월 적지 않은 돈을 생활비로 보냈다. 또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계속 뒷바라지를 할 거라고 암시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이미 인생의 반을 눈치채버린 여자들이 더 이상 그의 울타리 안에 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백모도 당숙모도 세상과 인생을 믿지 않듯이 난파당한 집을 수습하려 애쓰는 아버지의 열정을 믿지 않았다.
그뿐인가. 십오 년 동안 딸처럼 키운 초희 누나도 아버지를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나를 재혼시킬 때 만약 아이가 짐이 된다면 직접 키울 생각까지 하고 있었지만, 누나는 그의 힘을 믿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옆얼굴에 체념이 어렸다. 그것은 이미 분노보다는 슬픔 쪽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 낯설어 다가가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