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 그레이스 ! ①
다음해 삼월 중순 학교를 조퇴하고 온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처음엔 심한 감기라고 생각했는데 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기침을 할 때마다 가슴이 쪼개질듯 아팠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병문안을 올 때 사 온 샛노란 황도 통조림을 봐도 식욕이 동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주말에 나는 부모님과 함께 목포의 콜롬방 병원에 가서 결핵 진단을 받았다. 냉정해 보이는 깔끔한 용모를 가진 젊은 의사는 부모님 얼굴도 보지 않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증세가 심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것도 아닙니다. 육 개월 정도 통원 치료해야 합니다.”
의사는 안경알 속의 예리한 눈으로 내 몸을 훑어봤다.
“열한 살이라…. 또래에 비해 체격은 큰데 영양이 부족한가 보군요. 단백질 섭취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의사의 두 번째 판단은 엄마의 얼굴을 사색으로 만들어버렸다. 큼직한 두 손으로 엄마의 두 어깨를 짚고 서 있던 아버지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엄마의 관리 덕분에 나의 단백질 섭취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결핵에 걸려버렸다면 그건 나의 폐 기능이 선천적으로 약하다는 뜻이 아닌가?
누가 봐도 우리 집에 드리운 불길한 그림자가 기어이 어린 나까지 덮쳐버렸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것만은 막아보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던 엄마는 진료실 의자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시 후 나는 흰 시트가 깔린 철제 침대 위에 눕혀졌다. 그런데 주사기를 들고 다가오는 간호원이 한국 처녀가 아니라 흰 피부에 구슬 같은 파란 눈을 가진 서양인 수녀였다. 그때서야 나는 콜롬방 병원이 가톨릭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간호원의 절반이 미국인 수녀라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함평 성당에서 본, 정결하다 못해 거의 중성적으로 느껴지던 한국인 수녀들보다 훨씬 육감적인 미국인 수녀는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찰싹 친 뒤 주사기를 꽂았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학교에서 팔 바깥쪽에 맞는 예방주사보다 더 아팠다.
검은 제복을 입은 낯선 종족의 수녀가 작은 동양 남자의 엉덩이 근육을 잘 다루기나 할지도 불안했다. 왠지 미국 소년의 엉덩이와 내 엉덩이는 구조가 다를 것 같았다. 또 그곳의 주사기도 독특하게도 파란색이어서 영 신뢰가 가질 않았다. 그 틈에도 나는 의사와 수녀들 간의 대화를 통해 주사를 놔준 수녀의 이름이 그레이스라는 건 알아냈다.
그날 나를 위축시킨 건 병에 대한 공포만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리고 불경스럽게도 나는 파란 눈의 수녀 그레이스에게서 여성을 느꼈다. 사람들은 예쁜 누나들이 많은 집에서 컸는데 이제야 그걸 느끼느냐고 의아해하겠지만, 그거야말로 착각이다. 나는 여자들을 너무 가까이서 봐왔기 때문에, 즉 그녀들의 질투와 변덕, 사나움에 익숙하기 때문에 여자를 동경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또래 여자애들에게 느끼곤 하던 연정도 느껴본 적이 없다. 영영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낯선 분위기를 풍기는 성숙한 이국 여성이 내 가슴을 뛰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잘 보이고 싶은 여자 앞에서 맥없이 널브러진 채 엉덩이를 까놓고 주사를 맞아야만 하는 상황은 남자로선 최악이었다. 긴장과 떨림에 수치심까지 얹어지면 중환자라도 된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소독약 냄새가 밴 철제 침대 위에서 나는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없는 나의 운명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사흘만 지나도 어느새 병원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목포의 병원에 가 진찰을 받고 주사를 맞고 받아온 약을 먹었다.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학교에 가고 나빠지면 집에서 누워 지내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늘 내 몸 자체처럼 느껴지는 미열이 있었고, 어두워지면 천식 환자처럼 지루하게 기침을 했다.
수업 시간에 갑자기 기침이 터져 정적을 깨면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 조퇴를 할 때도 많았다. 나중엔 병을 앓는 게 아니라 병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비겁한 어른들이 아편에 취하듯 병에 취해버린 나는 이미 현실에 있지 않았다. 정말이었다. 그토록 나를 들뜨게 하고 옭아매기도 하던 조직이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나를 따르던 아이들이 종수를 따르며 새 무리를 형성해가도, 다시 걸핏하면 내 별명을 불러 젖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 없는 조직에서 아이들이 사소한 일로 아옹다옹하거나 종수가 내 고민들을 물려받아 전전긍긍하는 걸 보면 우스웠다. 내가 저토록 우스웠다니…. 두 볼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나는 토미에 대해서도 합법적으로 해방이 됐다. 단 하나의 적이자 대상이며 어떤 의미에선 타락한 동지인 나를 잃고 당황해하는 녀석을 보자 통쾌했다. 우리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힘이라는 것도 그것을 동경하는 사람에게만 힘인 것이다. 원하는 것이 많아서 늘 두려운 것이다. 나는 내가 가뿐하게 기화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나중엔 갓난아기로 퇴화해 엄마 뱃속으로 되돌아와버린 것 같았다.
그뿐인가? 오십 마리의 비둘기들도 멀찌감치 풍경으로 물러났다. 내가 엄마처럼 돌봐온 비둘기들이 동물도감 속의 새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 내가 어렴풋이 깨달은 것은 아, 누군가를, 심지어 동물을 사랑하는 데에도 힘이 드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약해지면 사랑을 할 힘을 잃고, 거기서 더 나가면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된다. 그러나 나는 상관없었다. 나는 기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내 존재가 흐릿해질수록 엄마는 꼭 그만큼 생생해졌다. 엄마는 폐에 좋다는 모든 먹을거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결론은 훼손된 짐승은 역시 동족인 짐승의 살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었다. 난 특별히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엄마는 끼니마다 양념해 석쇠에 구운 쇠고기를 상에 올렸다. 나는 엄마의 감시 속에 질긴 쇠고기를 억지로 씹어 먹은 뒤 체해서 괴로워하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또 담백한 민간약을 찾았다. 할머니가 직접 만든 사과 식초를 마시기도 했고 물엿에 푹 고은 도라지와 콩나물을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증세가 심해지면 어김없이 동물성으로 되돌아갔다.
개구리로 짐작되는 약을 억지로 마신 뒤 모조리 토해놓고 처절하게 항의를 해 엄마를 탈진하게 한 날, 모자는 한 가지 타협을 했다. 이상한 동물성 약들을 더 먹지 않는 대신 양유를 규칙적으로 마시기로 한 것이다. 그 틈에도 엄마는 양유가 우유보다 단백질이 더 많고 소화도 잘 되는 완전식품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다음 날부터 마을 변방에서 양을 키우는 청년이 사이다 병에 담아 온 양유를 따뜻하게 데워 두 번에 나누어 마시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