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가 평화의 상징이라고? ③
성당 건너편 국수 가게에서 마주쳤을 때도 토미는 내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구석 자리에 앉아 국수를 먹다 나를 힐긋 보더니 다시 다갈색 얼굴을 숙이고 열심히 먹었다.
나는 유스티나 수녀님 후임으로 오신 레지나 수녀님이 내온 국수를 먹으며 계속 녀석을 엿봤다. 얼굴은 찻잔 받침 접시만 한데 뱃구레는 큰지 그는 국수 한 그릇을 대여섯 젓가락에 먹어치우고 수녀님들을 봤다.
“국수 한 그릇 더 주세요.”
“국물은?…. 국물은 안 먹냐?”
총알처럼 튀어나간 내 말에 나도 놀라 탁자 밑에 감춰둔 두 손을 깍지 꼈다. 그런데 어느새 또 다른 말이 총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그게 진짠데. 정말 맛있는데.”
토미가 짜증이 묻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그러나 대꾸는 하지 않았다. 나 따위쯤 가뿐하게 무시할 수 있다는 듯 탁자 위에 올려놓은 제 두 손만 봤다. 이쯤에서 멈추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상하게도 내 말도 내 마음대로 돼주지 않았다. 그때 녀석이 충분히 서두르고 있는 레지나 수녀님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국수, 빨리빨리 주세요.”
“너….”
“….”
“영어는 못 해? 방금 그 말, 영어로 한번 해보지.”
토미의 반질반질한 얼굴이 험하게 구겨졌다. 한마디만 더 하면 그가 두 손으로 짚고 있는 탁자가 비행접시처럼 날아올 것 같았다. 입안에 담아둔, 언젠가 광주의 한 식당에서 너랑 비슷하게 생긴 아저씨를 봤는데 그가 영어로 말했던 것 같아서, 라는 말이 내장 속으로 되돌아갔다. 그때 뜻밖에도 토미가 적의와 짜증을 털어낸 담백한 얼굴로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너도 한 그릇 더 먹어라.”
“아, 아니. 됐어.”
두 번째 국수를 토미 앞에 놓아준 레지나 수녀님이 활짝 웃으며 녀석의 라면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친구도 사주려고? 힘세고 멋있는 줄만 알았더니 마음도 남해바다같이 넓네.”
수녀님의 표현이 나를 뜨끔하게 했다. 마음이 남해바다 같다고? 그 문장은 곧 이런 문장으로 바뀌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조지 박. 못됐구나. 속이 밴댕이같이 좁아. 아무도 공격하지 않는 외로운 친구를 건드리다니.’
유 수녀님이 떠나고 오신 수녀님들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지나 수녀님의 사랑을 잃은 것만 같아 가슴이 쓰라렸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계속 꼬여갔다. 나는 토미가 의도적으로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확신했다. 결과까지 예상해두고 잘 참는 척하고 관대한 척하다니. 그렇다면 정말 못된 아이는 토미가 아닌가? 그뿐인가? 녀석은 수녀님의 다정한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와는 달리 분명하게 한 사람 편을 들어주셨는데도.
나는 레지나 수녀님에게도 배신감을 느꼈다. 나를 향해 툭하면 날려주던 백목련 봉오리 같은 고귀한 미소를 어떻게 저런 뜨내기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그리고 녀석은 봄 햇볕처럼 포근한 수녀님의 눈길 앞에서도 어쩌면 저렇게 태연한가? 나는 녀석에게 증오를 느꼈다. 그때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꿈꾸는 무언가에 초연한 사람이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네 꿈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건 네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때 토미가 물 빠진 청바지의 뒤 호주머니에서 파릇한 새 지폐를 꺼내 수녀님에게 주었다. “저 녀석이 먹은 국수까지 같이 계산해주세요.”
저 새끼가…. 나는 비위가 확 상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를 약 올리고 있는 내가 먹은 국수 값을 내주다니. 이것이야말로 나를 확실하게 무시하는 행위가 아닌가? 그뿐인가? 레지나 수녀님이 오후의 햇빛 아래 조용히 끓고 있는 녀석의 라면머리를 또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앞으로 자주 와라. 잘생긴 얼굴 자주 좀 보여줘. 응?”
나는 국수 그릇을 탁자 끝으로 밀어놓고 일어섰다. 수녀님이 나를 힐긋 보더니 녀석에게 주고 남은 미소를 건성으로 뿌려주었다.
“수형이도 잘 가라.”
나는 토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다리가 길어 보폭도 큰 녀석은 뚜벅뚜벅 잘도 걸어갔다. 나는 그것도 기분 나빴다. 녀석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벅차다고 느낄 무렵 그가 뒤를 돌아봤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제법 예민한 초보 탐정 같은 눈으로 나를 훑어본 뒤 돌아서서 다시 걸었다. 나도 계속 녀석을 따라갔다.
그는 영산강의 지류인 지석천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에게서 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커스단에 들어가기 전엔 어디서 살았냐?”
“….”
“엄마랑? 아, 아님 고아원?”
“….”
“아, 알았어. 안 물을게.”
“인천에 있는 희망 고아원.”
토미는 덤덤하다 못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깟 과거 고백쯤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그런데 그 오만함이 또다시 나를 자극했다. 만약 녀석이 창피해하거나 화를 냈더라면 나는 가책을 느끼고 멈췄을 것이다. 그의 태연함은 그래, 네가 언제까지 당당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하는 이상한 오기를 발동시켰다.
“우리 학교에도 고아원 애들이 몇 명 있었거든. 지금은 그 고아원이 다른 읍으로 이사를 가 아이들도 다 따라가고 없지만. 와, 그때 걔들 굉장했었다. 사납고 싸움 잘하고 늘 저희끼리 똘똘 뭉쳐 다니고. 언젠가 눈치가 부족한 놈 하나가 고아원 애들 중 한 명이 자기를 때렸다고 선생님에게 일러바쳤어. 당연히 때린 아이는 선생님에게 많이 맞았지. 그러자 또 당연히 고아원 애들이 복수를 했어. 떼거리로 달려들어 고자질한 아이를 죽지 않을 만큼 패준 뒤 대장 아이가 송곳으로 그의 허벅지를 찔러버린 거야…. 대장 아이는 그날로 고아원을 나갔지. 다친 아이는 절름발이가 됐고.”
나는 토미를 돌아봤다. 그가 나를 살벌하게 보고 있었다. 온몸이 오싹했다. 주변의 공기도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했다. 내가 너무 많이 잘못했다는 걸 깨닫자 변명도 나와주지 않았다.
“아, 아니 난 그냥 그런 애들이 있었다는 거지. 내가 걔들을 특별히 싫어했던 건 아냐. 난 단지, 왜 그런 거 있잖아?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데 그냥 저 혼자…. 아, 아니다. 근데 너 학교는 안 다닐 거냐?”
그때 토미가 산짐승같이 달려들어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나랑… 싸우고 싶지?”
“….”
“나랑, 싸우고 싶어, 죽겠지?”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녀석의 두 눈이 내 눈을 흡수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대꾸도 못하고 목만 캑캑거렸다. 대신 눈매에 힘을 잔뜩 주고 녀석과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는 내 안간힘이 가소로운지 눈에서 힘을 풀고 피식 웃었다. 그는 나를 땅 위로 가볍게 던져버렸다.
“싸우고 싶으면 싸워야지. 따라와!”
엉덩방아의 아픔을 삭일 새도 없이 나는 발딱 일어섰다. 나는 따라갔다.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발을 뽑을 수도 없었다. 내가 나답지 않게 왜 이토록 못되고 눈치 없이 구는지 나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미 떠나버린 화살이었다. 걷다보니 에이, 이렇게 된 이상 한번 붙어보지, 속 시원하게 때려주든 피 터지게 얻어맞든 끝장이 나긴 나겠지, 하는 맹랑한 호기도 생겼다.
두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찌른 채 성큼성큼 걷던 녀석이 멈춰선 곳은 뜻밖에도 농촌지도소 앞이었다. 아이들은 드나들 일이 없는 어른들만의 공간으로 그는 왜 왔을까? 그러나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오늘은 국군의 날, 즉 휴일이어서 건물 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비로소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소름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적 없는 장소에서 둘이서만 싸운다는 건 내가 이겨도 그걸 보고 소문을 내줄 사람이 없고 지다 맞아 죽어도 말려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직립자세를 지탱하기도 힘들 만큼 겁이 났지만 달아날 곳은 없었다. 나는 두려움에 먹히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고 두 주먹을 꼭 쥔 채 녀석에게 돌진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