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가 평화의 상징이라고? ①
신부님이 나흘 간격으로 두 번이나 심방을 다녀가셨지만 아버지는 낫지 않았다. 입원을 해도 한 달은 치료해야 하는 병이라는 진단을 생각하면 당연한 경과였다. 단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불안과 불만의 입자들을 집안 가득 퍼뜨리는 할머니 때문에 누구도 편안하게 기다릴 수 없었을 뿐이다.
한창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십일월 초순 함평 읍내에 유랑 서커스단이 들어왔다. 거대하고 불결한 천막과 호객을 하는 난쟁이 광대 아저씨,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과는 너무 달라 보이는 공연자들을 멀리서 봤을 땐 시큰둥했다. 목포에서 살 때 엄마를 따라가 본 적이 있는데다, 영화와 비교할 때 서커스는 후지고 촌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려면 그 무엇이 액션 영화의 화통하고도 비장한 전투신만 하겠는가?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기분부터 달라졌다. 얼굴 한가운데에 빨간 코를 붙이고 뚱뚱한 광대복을 입고 뒤뚱거리는 난쟁이 아저씨의 안짱다리가 친근해지더니 어딘지 부족해 보이는 공연자들의 모습도 좋아졌다. 또 자는 시간을 빼곤 줄곧 들어야 하는, 너무 슬프고 처량해 곧장 뼛속으로 파고들어 버리는 서커스 음악도 좋아졌다.
나는 폼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들을 보며 해방감을 느꼈다. 내심 내가 늘 잡고 다니는 폼이 지겨웠던 걸까?
공연중인 천막 주위를 얼쩡거리다 들어가고픈 충동을 느끼고 뒤쪽 휘장을 슬쩍 들춰보면 어김없이 난쟁이 아저씨의 뻘건 얼굴이 튀어나와 으름장을 놓았다.
“애들은 엄마 아부지랑 와. 혼자선 안 돼, 절대 안 돼!”
입장료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을 야박하지 않게 표현해주는 센스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나를 정말 긴장시킨 건 부하인 친구들이 서커스를 몹시 관람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 아이들에겐 서커스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천막 앞을 지나칠 때마다 일제히 돌아가는 아이들의 고개와 까만 눈 속의 소박한 갈망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분명히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인데 영화처럼 자연스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봐도 내가 짧은 시간 안에 아이들의 입장료가 될 만한 돈을 마련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질질 끌고서라도 내 의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날 밤 나는 당장 내 식의 작전에 돌입했다. 먼저 누나들의 심부름을 해주고 받는 돈부터 대폭 올렸다. 저녁에 만두나 찐빵, 양갱 같은 군것질거리를 사오는 일에서 편지 심부름, 다리 주무르기, 안마까지 시간과 에너지를 꼼꼼히 계산해 값을 매겼다. 심지어 집에서 손톱깎이를 찾아줄 때도 돈을 받았다. 누나들은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치사한 녀석. 오늘부터 심부름 안 시킬 거야. 니 누나도 안 할 거야!”
그러나 누나들은 한 시간도 못돼 다시 나를 찾았다. 하나같이 자존심을 지키고 살기엔 너무 게을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공짜로 해주던 엄마의 심부름에도 값을 매겼는데 나와 같은 피를 가진 엄마는 내 표정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온갖 핑계를 만들어 내 손에 푼돈을 쥐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 때문에 아예 혼이 나가있다시피 한 할머니 곁엔 절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돈을 모으기 시작한지 나흘 만에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종수가 우리 패거리 모두에게 서커스 구경을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모두라니…. 나는 열등감과 모욕감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처음으로 식구들의 돈을 훔쳐서라도 선수를 치지 않은 걸 후회했다.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싫지만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 아이들 틈에 섞여 종수를 따라가야 하는 것.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굳이 튀는 행동을 해서 내가 녀석을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재미있었다. 검은 연미복을 입은 마술사가 들고 나온 유리잔 속에 꽉 찬 연기가 흰 손수건으로, 비둘기로 변해 날아오르거나, 어여쁜 처녀에게 바친 장미 한 송이가 장미 다발로 탈바꿈하거나, 다섯 장의 트럼프 카드가 화려한 중국 부채로 변신해가는 마술들은 다시 봐도 신기했다.
섬세한 몸과 무덤덤한 얼굴을 가진 중년 여자가 노동하듯 하는 공굴리기도 발육이 덜 된 연약한 처녀가 무표정하게 타는 공중그네도 또 목포에서 본 뒤 오래 내 심장을 떨리게 했던 불 쇼도 여전히 짜릿했다.
한 가지 마술이 끝날 때마다 아, 이런 식으로 종수에게 밀리다 나중엔 어떻게 되나, 싶어 심란해졌지만 다시 마술이 시작되면 거짓말처럼 가슴이 트였다.
2부가 시작되었을 때 한 소년이 무대로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사람들이 깜둥이라 부르는 흑인이었다. 정확히, 흑인과 한국인 사이의 혼혈아였다. 뽀글이 파마를 해놓은 듯한 곱슬머리와 검은 수석처럼 매끄러운 얼굴, 다갈색 눈동자, 그리고 우리의 팔다리의 1.5배는 돼 보이는 긴 팔다리….
처음에 앙증맞은 연미복을 입은 소년은 마술을 했다. 마술 자체는 평범했다. 일부에서 어른 마술사가 했던 것보다 몇 단계 낮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녀석은 눈길을 끌었다. 다섯 가지 마술을 무사히 끝낸 소년이 사회를 보기 시작했을 때 여기저기서 술렁거렸다. 저토록 특별한 얼굴을 가진 소년이 우리와 똑같이 능숙하게 한국말을 하다니, 하는 분위기였다.
그때서야 나는 서커스 단장이 왜 소년을 데리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소년의 외모 때문이었다. 녀석 자체가 독특한 볼거리여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튀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년이 아이들을 단숨에 매혹시켜버린 건 이부의 끝에서였다. 녀석이 눈을 지그시 감고 외국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 캔 스탑 러빙 유, 아이브 메이덥 마마인, 투 리빈 메모리, 옵더 론썸 타임, 아이 캔 스탑 러빙 유…. 데이 스틸 메잌 미 블루 데이, 세이 댓 타임….
매일 밤 라디오를 듣는 누나들이 요즘 푹 빠져 사는 레이 찰스의 <사랑할 수밖에 없어>였다. 진짜 레이 찰스라도 된 듯 맹인 흉내까지 내며 노래하는 녀석은 근사했다. 같은 흑인의 고독인가? 아니면 내가 녀석의 고독을 직통으로 느낄 만큼 외로워져 있는 걸까?
사방을 둘러보니 홀린 듯이 보고 있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모두 혼혈 소년의 늘씬한 몸매와 초콜릿 같은 달콤한 목소리에 매혹돼 있었다.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혹시 영화를 볼 때 보다 더 재미있는 건 아닐까? 내가 극장 관리인에게 눈총까지 받아가며 보여준 영화를 어쩌면 저렇게 쉽게 잊는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왔을까? 시간이 더 흐르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피곤하게도 경쟁자는 종수만이 아닌 것이다. 저 낯선 갈색 녀석도 언제든지 내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두 눈을 감았다. 매복해 있다 뛰쳐나온 적들을 쉴 새 없이 무찔러야 하는 졸병 군인처럼 나는 피곤했다.
*
다음 날 새벽 나는 빨리 눈을 떴다. 새우같이 몸을 구부리고 더 자보려고 노력했지만 곧 일어나 앉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총천연색 꿈들에 시달리느니 종일 피곤하더라도 깨는 편이 낫겠다 싶었던 것이다.
나는 할머니 방 앞으로 가봤다. 간밤에 무당집에 갔던 할머니는 새벽에 돌아왔는지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숨을 거둔 뒤 굳어가는 할머니라 해도 믿을 것 같은 그 모습에서 나는 공포를 느꼈다.
들어가지도 지나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있는데 흰 수건을 돌돌 꼬아 머리에 두른 둘째 누나가 마당으로 나와 맨손체조를 시작했다.
“수형이 너 웬일이냐? 아침마다 엄마 기운을 뺄 만큼 빼고서야 일어나는 잠꾸러기가.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아함, 난 몸이 찌뿌듯해서 운동이나 해야겠다.”
누나는 두 팔을 엉성하게 휘저으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나도 엄마가 있는 부엌으로 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때 아악, 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내 등을 때렸다.
나는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흰 수건 때문에 더 창백해 보이는 둘째 누나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땅에 떨어진 뭉클한 잿빛 덩어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비둘기의 시체였다. 암팡지다 못해 뚱뚱한 몸집으로 보아 대장 비둘기임이 분명한 새가 빨간 보자기 같은 선혈 속에 머리통을 푹 담근 채 죽어 있었다. 반쯤 뜬 새까만 눈 주위로도 피가 동심원들을 그리며 번져가고 있었다.
산에서 사는 매가 민가까지 내려와 어린 가축들을 잡아먹는 일은 흔했지만 그런 경우는 아니었다. 만약 매였다면 먼저 날카로운 부리로 목부터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놓았을 것이다.
나는 마당으로 돌아와 새집들 앞으로 가 주먹을 입에 대고 새 울음소리를 내봤다. 곧 어미 새들의 머리가 튀어나와 밖을 기웃거렸다. 새집 내부를 하나씩 염탐해가던 나는 마지막 집에서 상처투성이 머리를 달고 모여 앉아 있는 숫비둘기 세 마리를 봐버렸다. 녀석들의 눈엔 치열한 전투와 희생 많은 승리의 여운이 붉은 베일처럼 어려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대장 새는 저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인가?
“동족상잔이 따로 없네. 완전히 6.25야. 6.25.”
어느새 초희 누나가 내 옆으로 와 새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피 묻은 부리로 사냥해둔 벌레를 쪼아 먹고 있는 새들의 발을 봤다.
유독 마지막 새집 안으로만 풍성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 속에 드러난 그들의 발엔 민물고기 비늘이나 뱀의 가죽을 연상시키는 징그러운 무늬들이 촘촘했다. 둥글고 큰 몸을 지탱하는 가는 다리들도 애처로워 보였다. 새, 하면 곧장 자유를 떠올리는 것도 나태한 습관이 아닐까? 어쩌면 새들이 냉정한 파충류에서 진화해온 종족이라는 견해는 맞는지도 모른다. 싸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사이좋게 모이를 나눠 먹고 있는 이 셋이 곧 싸움을 시작할 수도 있고 다른 새들의 도전을 받을 수도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새들의 수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의하면, 그것은 자연의 질서였다. 대장 숫사자는 자신과 비슷한 힘을 가진 다른 숫사자가 무리에 끼는 걸 용납할 수 없고, 벌통 안의 여왕벌은 다른 여왕벌과 공존하기 싫어서 그 여왕벌은 물론 그녀의 애벌레들까지 침으로 쏘아 죽인다. 동물은 그렇듯 가장 냉혹한 방식으로 가장 나은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주려 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전쟁 후의 첫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새들을 노려보다 빨간 대문 앞으로 돌아왔다. 따가운 초가을 햇볕 속에 부패가 시작된 진회색 비둘기 주위에 벌레들이 우글거렸다. 생기와 힘을 약탈당한 죽은 육체는 죽어서도 쉬지 못하고 다른 생물에게 먹히고 있었다.
이유는 역시 단 하나, 지나치게 많아진 산 것들이 더 많은 먹이를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건 쿠데타야. 딱 5.16이라구.”
유난히 표현력이 좋은 초희 누나가 또 나를 자극했다. 누나의 말이 농담인 줄 알면서도 기습이라도 당한 듯 심장이 떨렸다. 꼭 내가 지적을 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