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내겐 너무 무거운 의무 ③
아이들 간의 평화는 오래 유지되진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우리 안의 미지근한 평화와 두루뭉수리한 정을 대놓고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조직 구성이나 지배, 자잘한 폭력에 대한 욕망이 야생 독초처럼 움텄다. 서로의 눈에서 불순한 욕망을 확인하고 민망해져 눈길을 돌릴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욕망들을 정면으로 보게 되는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사학년 봄 대운동회였다. 학부모와 어린 동생들, 노인들, 군것질감을 파는 수레들까지 모여 흥청거리는 축제 분위기 속에 단거리 달리기와 계주를 일등으로 끝낸 뒤 줄다리기 대열 속에 앉아 있을 때였다.
중앙의 단상 옆의 흰 천막 속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감색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경찰서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떠봤다. 밖에서 보는 아버지는 집에서 늘 보던 아버지와는 많이 달랐다.
나는 일어섰다. 그때, 아버지의 눈과 내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버지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다시 앉아 줄을 쥔 순간 나는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우선 나를 보는 아이들의 눈이 달랐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대열에 가득했다.
그 후 어떤 아이도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거나 습관적으로 조지 박이라고 불러대던 녀석들도 없어졌다. 나와 아이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물론 내 아버지의 지위와 힘 때문에 나를 특별 취급하는 분위기는 전부터 있었지만 삼팔선처럼 결정적인 선이 그어진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것이 타이밍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소년들이 제법 자라 남자의 힘과 지위, 질서에 관심을 갖게 된 시점과 진짜 힘을 가진 어른인 아버지를 목격한 시점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 후 나는 몇 번에 걸쳐 대장이 되고 싶은 욕망을 내비쳤고, 아이들은 받아들여주었다.
나는 대장의 권리만 누리며 함부로 구는 얼치기는 아니었다. 나는 꼭 권리만큼의 의무를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의무의 양은 만만치 않았다.
대장은 싸움 전략이나 장난감 같은 문제들은 물론 아이들 간의 관계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다툼들도 해결해줘야 했다. 무엇보다도 공정해야 했고, 칭찬은 해주되 내 위치를 넘보지 않게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했고, 야단을 칠 때도 조직 속의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만은 절대 삼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무엇에 허기져 있는가도 봐두어야 했다.
진짜 대장이 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버지와 엄마, 편물로 돈을 버는 두 누나에게 살갑게 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들과 마주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귀여운 얼굴을 연출해낼 줄 아는 나는 말 그대로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였다. 아이들과의 관계에선 내가 쇠붙이들을 끄는 자석인데. 나는 아이들 속에서 커지기 위해 집에 있는 동안은 눈을 질끈 감고 작아지기로 했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때문에 고민했다. 집에 센베이나 젤리, 전병 같은 과자 선물이 들어오면 늘 절반을 꺼내 다락에 숨겨두곤 했지만 명절 때 집에서 만드는 강정이나 약과, 유과는 감출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엄마가 내 용도를 염두에 두고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과자 제조 인력인 누나들이 혹사당한 끝에 고통과 지겨움을 호소해도 엄마는 무시했다. 악덕 사장이 돼버린 듯 계속 다그치기까지 했다. 결국 누나들 중 가장 반복적인 일을 싫어하는 셋째 누나가 약과 반죽을 떼어 상 위로 툭툭 던지며 투덜거렸다.
“대체 뭐 하러 이딴 걸 이렇게 많이 만들어요? 엄마, 과자 장수라도 할 거야?”
“만든다고 앉았으면 조용히, 끝까지 만들 것이지 왜 따져? 따지길? 그리고 이것들을 어디에 쓸 거냐고? 내가 다아 먹을 거다. 됐냐?”
그래도 늘 끝까지 반항하는 편인 셋째 누나가 사태를 다 알고도 남는다는 듯 내 머리를 세게 쥐어박아도 엄마는 모른 척했다. 엄마의 까무잡잡한 작은 얼굴엔 함지박 속에 든 상당한 양의 반죽을 기어이 먹음직스러운 과자로 변신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만이 가득했다.
*
자라면서 아이들의 기호도 달라졌다. 사탕보다 달고 놀이보다 짜릿한 것은 세상에 많았다. 그것들 중에서도 가장 성숙하고 멋진 것이 영화였다. 그리고 영화는 내가 처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친구 하나를 데리고 한국 영화와 미국 영화를 번갈아 상영하는 진성극장으로 갔다. 나는 삼 년 동안 엄마와 함께 그곳을 다니며 극장 사람들이 나를 거절하기 힘든 처지라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내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
예상대로 극장 관리자는 나와 내 친구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우리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표를 끊지 않고 들어갔다. 그날 맨 앞줄에 앉아 공짜 관객만의 희미한 죄책감에 가슴을 졸이며 본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었다.
줄거리는 근사했다. 6.25 전쟁 막바지에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들이 적의 지하 기갑부대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북진하다 중공군을 맞아 싸워 이기지만 모두 전사하고 최무룡 분대만이 살아남아 간호장교 애인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영화의 뒷부분에서 최무룡 분대장이 ‘전쟁에서 살아남기보다는 저승으로 가는 동지들의 길동무가 되어주고 싶소’라고 말할 땐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대장만의 복잡하고 고독한 죄책감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와 나는 어둠 속에서 서로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때 나는 남자의 가슴 속엔 싸워 이기고 싶은 욕망과 위대한 것에 자신을 바쳐버리고 싶은 욕망이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다음 주 일요일 낮 나는 극장에 데려가는 아이를 둘로 늘려봤다. 아저씨는 여전히 다정하게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고, 사람들이 없을 때 살짝 들여보내 주었다. 그 다음 주에 갈 때는 아이들을 셋으로 늘렸다. 아저씨의 표정과 행동은 전과 똑같았다. 기고만장해진 나는 다섯 번 째 갈 땐 아이들을 넷으로 늘렸다.
마침 한꺼번에 밀어닥친 손님들 때문에 쩔쩔매고 있던 아저씨는 한가해지자 극장 뒤쪽으로 가 담배를 피우고 와서 우리를 들여보내 주었다.
그런데 휴게실을 거쳐 상영관으로 걸어가는 내내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상영관 문을 열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니 아저씨가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매표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날은 영화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젠 내 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의례적인 칭찬을 해주는 것조차 잊고 방방 떠서 떠드는 아이들의 옆얼굴도 거슬렸다. 두 시간 내내 건성으로 영화를 보며, 나는 지금은 절제와 타협이 필요한 때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후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데려갔지만 수는 넷으로 제한했다. 아저씨의 표정은 다시 온화해졌고, 그 후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구기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변함없이 공평하게 행복한 넷 안에 끼는 아이들을 매번 바꿔주는 걸 잊지 않았다. 내 힘의 한계를 깨닫게 된 것은 무안하고 쓰라렸지만 어른들 세계에서 지켜야만 하는 규칙 하나를 발견해낸 기쁨은 상당히 컸다.
그 무렵 나는 지나치게 커진 내 권력이 부작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공짜 영화 관람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조용히 있는 종수를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웃기는 건 그걸 알면서도 내가 절정의 힘에 대한 도취를 멈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 힘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안달복달했는지도 모른다.
<창살 없는 감옥>과 <빨간 마후라>, <성난 코스모스>, <맨발의 청춘> 같은 짜릿하고도 흥미진진한 영화들과 함께 사학년 봄과 여름이 신기루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
날이 갈수록 종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녀석은 별 이유도 없이 혹은 사소한 빌미도 악착같이 걸고넘어지며 고요한 우물 속 같은 일상의 평화를 깨버리려 했다.
모처럼 모여 찐 옥수수를 먹을 때 먹다 만 제 것을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옥수수들이 수북한 쟁반에 던지기도 했고, 모두 게임을 만끽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 벌컥 짜증을 내기도 했다. 또 천렵을 가다 느닷없이 옆 아이의 멱살을 틀어쥐고 욕을 했다. 한번은 심심풀이 게임에 졌다는 이유로 파트너의 뺨을 후려치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럴 때면 맞은 아이는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면 또 당연히 나는 시시비비를 가려주어야 했다. 종수의 잘못을 말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종수는 나를 시험에 빠트리고 싶어 안달하는 기색이었다.
‘자, 나에 대해 실컷 나쁘게 말해봐!’
나는 대장답게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면서도 감정적 비난으로 들리지 않게 해줄 어휘들을 골라 판결을 해주어야 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힘들어졌다. 적당한 표현을 고르지 못해 등에 땀이 찰 때도 많았다. 난처해하는 나를 집어삼킬 듯이 보는 종수의 시선 속엔 엄마 잃은 소년의 보상 욕구가 가득했다. 또 형들이 그를 전처럼 심하게 구박하진 않는 것도 그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실제로 녀석은 형제애를 어설프게 과시하기도 했다. 내가 전쟁놀이에서 무기 준비를 제대로 못 해내거나 위험한 지형에서 돌격 명령을 취소할 때면 꼭 돌림 노래 후렴을 부르듯 똑같은 말을 했다.
“우리 형들이라면 할 수 있을 텐데. 틀림없이 그 문젤 해결할 수 있을 거야. 한번 부탁해볼까?”
실제로 그 말은 나를 꽤 자극했다. 왜냐하면 내겐 형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넷이나 되는 누나들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내 꿈이나 취미, 고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 신경은 점점 예민해졌다. 힘을 유지하는 일이 이토록 힘들다니. 시도 때도 없는 이 괴로움에 비하면 아이들을 통제하며 느끼는 기쁨은 정말 짧았다. 그렇듯 만성적으로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또 틈만 나면 대장의 품위와 체면만큼은 지켜보려 애쓰는 허영심 많은 아이가 그즈음의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