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누구의 상처가 더 큰가 ③
한 달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엄마가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몸과 표정, 말로 엄마의 눈치를 봐가며 모범수처럼 생활하던 가족들은 안방으로 모여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생각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맞아, 엄마가 명쾌한 교통정리만으로 모든 걸 끝낼 사람은 아니었지. 엉거주춤 앉은 가족들을 둘러보는 엄마는 왠지 작은 왕국의 여왕같이 우아하고 강력해 보였다. 엄마는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제가, 함평 읍내에서 포목점을 한번 해보려구요.”
식구들은 멍한 얼굴로 엄마를 봤다. 엄마와 장사라니…. 엄마에게 포목점을 경영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느닷없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힘을 즐기는 엄마는 상상이 되지만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며 천을 파는 엄마는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엄마는 변함없이 우아하게 웃었다.
“왜요? 놀랐어요? 모두 하나쯤 있었으면 하던데. 무슨 돈으로 가게를 여나, 하고 걱정하시는 거라면 안심해도 돼요. 모아둔 돈에 빚을 조금 내면 밑천은 마련할 수 있으니까요.”
아버지는 갑자기 아침에 다 봤던 신문을 집어 들었다. 아버지는 두 눈을 부라리듯 뜨고 기사들을 훑어보는 척했다. 직원들의 업무 보고를 들을 때만큼의 반응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사인이었다. 아랫목에서 화투를 만지작거리던 할머니도 역시 별 일은 안 되겠다 싶은지 다시 화투 무늬들을 살펴봤다. 나는 가슴이 찡했다. 아, 최근 한 달간의 엄마의 외출은 모두 목포행이었구나. 혼자 포목점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봤겠구나. 그러니까 이건 엄마의 비장한 독립 선언이구나…. 그런데 그 몸부림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가족들의 반응에 다시 상처를 입은 엄마는 결국 페이스를 잃고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요, 요즘 자기가 멋쟁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은 모두 양장을 맞춰 입죠. 하지만 한복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아요. 양장이 워낙 비싸기도 하지만 여자들도 중년이 되어 살이 찌면 외출복으로 한복을 찾게 돼 있거든요. 또 잔치옷은 여전히 한복이구요. 물론 한복도 유행을 타죠. 언뜻 보면 일본 밀수품인 장미꽃 무늬 실크나 홍콩산 연보라색 레이스 천들이 유행인 것 같지만 여전히 많이 팔리는 건 비로드래요. 까만 비로드가 아니라 보라색, 자주색, 청록색 비로드요. 또 나일론은 광택이 좋은 일본산 격자무늬 나일론을 최고로 쳐줘요. 작년과 달라진 건….”
엄마의 분석이 세밀하고 예리할수록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어른들은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들만의 뜨거운 반응을 과감하게 보여주고 싶은데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이미 공격 모드로 자신을 바꿔가고 있었다.
“솔직히 포목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정말 이렇게 한물 간 일을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당신이 광주로 발령을 받기만 했으면 충장로에서 최고급 기술을 가진 직원들을 고용해 미모사 같은 양장점을 했을 거야.”
엄마는 특유의 도도하면서도 약간 시큰둥해하는 말투로 장사가 얼마만큼 되면 얼마만큼 번다더라고까지 덧붙였다. 엄마는 여전히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흘겨본 뒤 새침하게 돌아앉았다.
“아마 당신이 아는 사람이 많은 것도 꽤 도움이 되겠죠.”
비로소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핏발 선 큰 눈이 역시 핏발선 엄마의 큰 눈을 노려봤다. 내가 알기론 가해자인 아버지가 웬일인지 피해자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또 다른 피해자인 엄마의 상처를 위로할 여유도 의지도 전혀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아버지는 스스로 폭발해버렸다.
“그만, 그만 좀 해! 나더러 이 알량한 자릴 업고 여편네 장사를 도우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 싫음… 관두시구요.”
엄마는 기가 죽어 뒤로 물러나 앉았다. 온몸으로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도 막상 아버지가 다시 신문을 펼치자 기어이 입안의 가시들을 토해버렸다.
“흥, 내가 내 손님 모으면 되지. 내가 못할 것 같아요? 사람 우습게 보지 말아요. 나도 할 수 있어.”
“이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 열 명 중 일곱은 나 보고 가는 사람들일 걸. 그럼 내가, 이 좁은 바닥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얘들은 어떡하고? 또 어머니는? 내가 언제 밥 굶겼어?”
“내가 밥 못 먹어서 이래요? 그리고, 내가 나 하나 좋자고 이 난리를 떨어요? 많이 벌어 많이 쓰면 좋잖아요? 아,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왜 난.”
그때 엄마의 말꼬리가 싹둑 잘렸다. 아버지가 엄마의 이마를 겨냥하고 유리 재떨이를 던진 것이다. 엄마가 억, 하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막내 누나가 엄마에게 달려갔다. 숨을 죽인 채 아들 부부를 지켜보던 할머니도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엄마를 일으켜 앉혔다.
“에, 에미야. 괜찮냐?”
할머니는 초조한 표정으로 하, 하, 하고 신음을 토해내고 있는 엄마의 이마를 살펴봤다. 한참 후 창백하던 할머니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다행히 안 맞고 스쳐갔네. 참말 다행이다. 이게 정통으로 맞았으면 어쩔 뻔했나?”
할머니는 돌아앉아 아버지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성에 낀 유리창처럼 새파래진 할머니는 무서운 심판관 같았다. 불과 오 분 전만 해도 상처 자체가 되어 또 다른 상처인 엄마에게 악을 쓰던 아버지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할머니는 주먹을 꼭 쥔 채 부르르 떨더니 벌떡 일어섰다.
“자네 지금, 다 큰 애들 보는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