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겨야만 돌아갈 수 있어 ④
윗옷과 바지가 먼지투성이인 데다 눈꺼풀, 입술마저 부어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는 바가지에 물을 담아 마당에 뿌리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자 바가지를 떨어뜨렸다. 눈앞에서 희뿌연 물보라가 일어났다. 얼굴에서 물방울들을 털어냈을 땐 이미 엄마의 떨리는 두 손이 내 온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가. 수형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엄마의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다친 부위가 더 쓰라려서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찌 된 일이냐구? 말을 해! 응?”
나는 부은 입술에 갇혀 잘 새어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뜻밖에도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어른들 싸움에서나 아이들 싸움에서나 늘 문제가 되기 마련인 누가 먼저 때렸냐, 얼마만큼 때렸냐 같은 부분에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광산에서 막 캐낸 원석처럼 번쩍이는 엄마의 눈동자는 어떤 순수한 에너지를 뿜고 있었다. 엄마는 내 어깨를 꽉 쥐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니?”
순간 나는 내가 엄마에게서 원한 건 위로였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가 내가 싸운 것에 너무 화를 내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엄마의 무릎 위로 무너져 내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슬픔이나 외로움은 안중에도 없는 엄마의 두 눈은 내 두 눈을 빨아들일 듯이 보고 있다.
“이겼니? 졌니? 어느 쪽이야?”
그때서야 나는 사태를 명확하게 깨달았다. 나는 이겼기 때문에 잘못한 게 아닌 것이다. 적어도 이 집에선. 당연히 지금 이 순간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답이 나왔다. 나는 거만한 표정으로 뻐기듯이 말했다.
“이겼지. 당연히”
엄마의 얼굴이 빛무리를 머금은 듯 환해졌다. 엄마는 암사자처럼 덤벼들어 나를 끌어안았다.
“아이구, 내 새끼. 잘했다. 잘했어!”
엄마는 내가 다친 것조차 잊었는지 내 얼굴에 입을 맞추고 상처를 만지고 아직 얼얼한 머리를 흔들어댔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나를 보는 엄마의 두 눈은 여전히 뜨거웠다.
“종수 걘 많이 맞았겠네. 말 그대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겠구나. 안 그래도 작은 눈이 볼 만하겠네. 걔, 아예 눈도 못 뜨지?”
엄마의 얼굴은 곧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엄마는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지긋이 쥔 뒤 비장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절대로 지지 말아라. 지거든…. 아무튼, 지면, 안 돼!”
집에 들어오지도 마라, 라는 말을 예상하고 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의 내쉬었다. 엄마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내 얼굴과 목, 손을 닦아주고 상처에 연고를 발라준 뒤 개선 장군의 식사라도 준비하듯 정성스럽게 저녁밥을 지었다. 한동안은 나도 가슴이 뿌듯했다. 그러나 곧 기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외로웠다. 살아가는 동안 나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구나. 이기지 않으면 나를 지탱해갈 수 없겠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 옆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대신 비둘기들에게 가 그들을 꼭 안고 따뜻한 흰 배를 만져보고 싶었다. 또 탁구공만 한 알도 살포시 쥐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암컷들이 알을 품는 부화기여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무덥고 눅눅한 날씨 탓인지 암컷 한 마리가 몹시 예민해져 있었다. 오래 전 내가 다가가자 제 부리로 알을 깨버리는 암컷을 본 적도 있다. 내가 너무 놀라 울먹이자 아버지는 조용히 내 눈을 가려주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새끼가 알에서 막 깨어나려 할 때 알을 쪼아 형체를 다 갖춘 새끼를 먹어버리는 암컷도 있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거기서 한발 더 나가면 자살해버리기도 해. 새들도 사람처럼 자살해.”
“자살이 뭐예요?”
“남에게 죽음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자신을 죽여버리는 거야. 비둘기들은 대체로 물에 빠져 죽는다더라.”
“에이, 끔찍해!”
“다 살기가 고달퍼서 하는 짓들이란다. 동물원에서도 하룻밤 사이에 갓 낳은 호랑이 새끼가 없어지는 일이 종종 있대. 분명히 다섯 마리였는데 네 마리만 남아 있고 어미의 입이나 바닥에 핏자국이 있으면 백이면 백 어미 호랑이가 먹은 거야. 물론 먹힌 새끼는 몸이 가장 약한 녀석이지.”
“말도 안 돼. 약한 새끼일수록 보호해줘야 하잖아요?”
“어차피 허약한 새끼는 사냥하는 어른으로 크질 못하고 다른 짐승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거지. 남에게 먹히는 걸 보느니 자기가 먹어주는 거야. 즉 엄마 뱃속으로 도로 집어넣어주는 거지.”
“에이, 말도 안 돼!”
“어렵지? 그래, 이해하지 마라.”
그러나 모처럼 내 등을 다독거려주는 아버지 손의 온기도 내 마음을 덥혀주진 못했다. 곧 아기 비둘기라는 새 식구들이 생길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야 비로소 기분이 조금 나아졌던 것 같다.
결국 위로받기를 포기한 나는 엄마에게서 멀리 떨어져 화단의 가장 큰 돌 위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추워졌다. 입 안에서 이빨들이 저희끼리 딱딱,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