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겨야만 돌아갈 수 있어 ②
어느 뜨거운 여름 날 나는 함평 성당 앞을 지나가다 은은한 멸치 국물 냄새를 맡고 걸음을 멈췄다. 마을 전체를 유혹하듯 주변의 공기를 적시고 있는 그 냄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의 냄새이면서 음식 전체를 상징하는 어떤 애틋한 냄새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성당 맞은편의 허름한 단층짜리 블록 건물 안에서 눈부시게 흰 여름 제복을 입은 수녀들이 국수를 팔고 있었다. 나는 다가갔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뜨거운 김을 피워 올리는 멸치 육수가 담긴 가마솥도, 동글동글하게 말린 국수들이 얌전히 담긴 채반도, 그리고 수녀들의 맑고 노르스름한 얼굴과 부조화를 이루는 촌부처럼 씩씩하게 걷어 부친 두 팔도.
그때 문득 이따위 하찮은 음식이나 기웃거리는 나를 한창 알아가고 있는 함평 아이들이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를 견제하는 종수가 본다면? 그것은 그가 나에 대해 갖는 인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코앞으로 다가온 둘의 몸싸움의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다. 결정적인 한 방으로 승패가 갈리는 실제 싸움에선 무엇보다도 선제공격이 중요하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게 바로 상대의 인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수만이라도 나를 보지 않기를 잠깐 빌었다.
뜨거운 햇빛과 중노동에 지친 남자들이 국수 한 그릇을 네댓 입에 먹어 치운 뒤 휘적휘적 사라지는 걸 세 번쯤 봤을까. 가건물 안이 한산해졌다. 수녀들도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나는 돌아섰다. 그때 내 뒤쪽에 서 있던 수녀가 부리나케 쫓아 나와 내 팔을 붙들었다.
“얘, 가긴 어딜 가?”
손님들의 국수에 국물을 부어주던 수녀 옆에서 줄 선 사람들의 수를 세보고 돈을 받던 키 큰 수녀였다. 키다리 수녀는 엉거주춤 앉더니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내 얼굴을 뜯어봤다.
“어쩜, 잘 생겼네…. 아휴, 쌍꺼풀진 큰 눈에 오뚝한 코, 게다가 이 짱구 머리. 어머머, 얘, 얘 좀 봐, 앞통수에서 뒤통수까지가 왜 이렇게 길어?”
나는 평범한 여자들과는 뼛속까지 달라 보이는 수녀의 입에서 지독히 평범한 말들이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햇빛을 등지고 서는 바람에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된 말라깽이 수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꼭 미국 아이 같이 생겼네.”
“맞아.”
손뼉을 짝짝 친 키다리 수녀는 아예 내 얼굴 앞에 제 얼굴을 갖다 댔다. 갸름한 눈 속에 담긴 까만 눈동자에 장난기가 출렁거렸다. 수녀는 길고 깡마른 손으로 내 머리를 막 흔들어댔다.
“너 나중에 영화배우 해라. 최무룡이나 김진규, 신성일 같은. 어린애답지 않은 성숙함에 여자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눈, 소신 있는 턱. 얘, 니가 그 사람들보다 못할 게 뭐 있니? 아냐, 니가 더 낫다.”
최무룡, 김진규, 신성일? 수녀들을 계속 올려다보느라 뒷목이 뻐근한 내가 누굴 그윽하게 내려다봤다고? 키다리 수녀가 내뱉는 전혀 신성하지 못한 단어들 앞에서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나를 더 당황하게 한 건 다른 수녀들이 맞아, 맞아, 하고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었다는 것이었다. 수녀들은 계속 쨍쨍한 목소리로 수다를 떨어댔다. 정말 덜컹거리는 시골 버스 안에서 눈치도 안 보고 떠드는 여드름투성이 여학생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멍하게 서 있자 수녀들은 별의별 질문들을 퍼부었다. 결국 나는 할머니와 부모님, 누나들에 대해 꽤 많은 말을 해버렸다. 수녀들은 이번 주일에 꼭 엄마랑 같이 성당에 나와야 해, 하고 부담을 준 뒤 자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말해주었다.
“난 엘리사벳이야.”
“난 마리아.”
“나는 레아 수녀.”
“난 유스티나 수녀다. 요 녀석, 잊어버리기만 해봐!”
당연히 나는 그 길고 어려운 세례명들을 듣자마자 다 잊어버렸다. 그날 내가 기억한 건 딱 하나, 키다리 수녀의 세례명인 유스티나뿐이었다.
잠시 후 유스티나 수녀가 나서서 내게 국수를 말아주었다. 공짜 국수였다. 국수 맛은 황홀했다. 진하게 우려낸 멸치 국물을 붓고 채 썰어 볶은 오이만 고명으로 얹었을 뿐인데도 집에서 격식을 갖춰 해 먹는 잔치 국수보다 훨씬 맛있었다. 국수를 반쯤 먹었을 때 조용히 서 있던 늙은 수녀가 말을 걸었다.
“얘, 네 이름이나 알자. 이름이 뭐니?”
“박, 수, 형이요.”
그때 나를 보고 있던 유스티나 수녀의 눈이 번쩍, 빛났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얼른 국수 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잠시 후 유스티나 수녀가 폭소를 터뜨렸다.
“맞다, 맞다. 조지 박! 그래, 너, 오늘부터 조지 박 해라. 너에겐 박수형이란 이름보단 미국식 이름이 훨씬 어울려.”
수녀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멸치 국물 냄새에 이끌려 들어왔다 졸지에 이상한 이름을 받아버린 나는 결국 젓가락을 놓았다. 수녀들의 장난감이 돼버린 느낌은 고약했다. 목포 시절 동네 아줌마들이 귀엽다며 내 머리통을 흔들고 볼을 꼬집고 가끔 입까지 맞춰대면 귀찮고 지겹기만 했는데, 수녀들의 취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왠지 그녀들은 내 마음대로 좋아하거나 싫어해선 안 될, 어떤 다른 장소에 속한 여자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조지라는 별명도 그 자체론 대수로운 게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 곧 터져버렸다. 집에 가려고 뒤로 돌아섰을 때 블록 건물 앞에 내가 이곳에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 단 한 사람인 종수가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느님은 없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이런 풍경은 생길 수 없다. 품이라곤 없어 뵈는 종수의 오종종한 얼굴엔 적의 결정적인 약점을 잡아내고야 말았다는 쾌감이 흥건했다. 단순한 캐릭터인 녀석을 바싹 구워삶아 판단력을 마비시킬 미끼라도 던져보고 싶은데 떠오르는 게 없었다. 별 수 없이 태연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어이, 김종수. 오랜만이다. 심부름 가는 중이냐?”
“박수형…. 국수 사 먹었구나.”
“그래.”
“수녀님들이 말아주는 국수 맛, 조오치? 그럼, 조오케치?”
내 인사엔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들었다 놨다 하던 녀석이 다시 히죽 웃었다. 늦게 이를 가는지 앞니 두 개가 빠져 있는 그의 입 언저리가 실룩거렸다. 그의 눈이 다시 번뜩, 빛났다고 느낀 순간 이미 그의 두 발은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떼고 있었다.
“나도 내일 엄마랑 성당 국수나 먹으러 나와야겠다.”
에이, 씨…. 나는 녀석이 떠난 쪽으로 돌멩이를 차버렸다. 돌조차 나를 비웃는지 발가락들이 얼얼하다 못해 아팠다. 한참 동안 깨금발을 하고 빙빙 돌며 병든 강아지같이 낑낑거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