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겨야만 돌아갈 수 있어 ①
8월 24일, 나는 2학기 개학에 맞춰 함평국민학교로 전학을 했고, 바로 그날 오후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세 번째 혹은 네 번째로 충돌한 종수와 딱지 결전을 벌였다. 너무 빠른 충돌은 아니었다. 방학 내내 그가 우리 집 주변을 배회한 걸 생각하면, 꽃 진 자리에 맺힌 열매가 햇빛에 익어가다 내부의 팽창을 못 견디고 툭 터져버렸을 때와 비슷한 진행이었다.
집에 들러 딱지들을 가져온 나와 종수는 아이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마주서서 서로를 탐색했다. 적과 관객 모두를 압도해버리기 위해 전 재산을 가져온 나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종수의 평범한 딱지들을 보자 산뜻한 전투욕을 느꼈다. 그래도 잠깐 고민을 하긴 했다. 목포 골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쓰리스타 장군 딱지부터 꺼내들고 처음부터 휘몰아쳐볼까? 아니면 목포 아이들에게 딴 쫄병 딱지부터 내보내 상대에게 승리의 기쁨을 잠깐이나마 맛보게 한 뒤 뒤통수를 후려칠까? 늘 너무 단순한 것을 싫어하는 나는 두 번째를 선택하고 가위바위보도 대충 했다.
예상대로 종수는 최대한 숨을 죽인 비료 포대 왕딱지로 내 쫄병 딱지들을 훌렁훌렁 뒤집어갔다. 손목에 아낌없이 힘을 불어넣어 십중팔구 빨리 지치게 돼 있는 우직한 기술이었다. 성질까지 급한 녀석이 아이들의 환호 속에 웃통을 확 벗어젖혔을 때, 나는 쓰리스타 딱지를 내보내 적진에서 음흉하게 웃고 있는 내 쫄병 딱지들과 흥분으로 나태해진 적의 딱지들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최대한 힘을 내면서도 손목께에선 힘을 슬쩍 빼줄 줄도 아는 기본기에 메치기와 칼치기를 배합한 묘기로 종수의 딱지들을 튀어 오르게 해 부침개 뒤집듯 뒤집자 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결국 내 비장의 칼치기를 맞은 그의 마지막 딱지가 빙글빙글 돌다 뒤집히며 뒷면에 붙은 깜찍한 무당벌레까지 함께 넘어갔을 때, 아이들의 환호가 터졌다. 정말 폭죽이 터진 것 같았다. 놀이터에서 소꿉놀이를 하던 상고머리 여자애들도 살림을 팽개치고 달려와 꺄악, 꺄악,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웃통을 벗어젖히자 여자애들의 눈동자에 쩍쩍 금이 갔다. 나는 환호를 즐길 만큼 즐긴 뒤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자, 지금 이 순간부터 나한테 붙을 사람들은 이 대장 딱지에 손을 얹어!”
당연히 아이들은 망설였다. 출장소 앞에서부터 호의를 내보인 아이들과 오늘 동요하기 시작한 아이들은 많았지만 그들도 종수 앞에서 정체를 드러낼 순 없었다. 딱지는 분명 흥미진진한 게임이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몸싸움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불안에 먹혀버린 종수가 거구의 곰같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아찔했다. 이미 팔을 너무 혹사시켜서 육탄전에선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난 단지 승자의 기쁨을 만끽했을 뿐인데.
그러나 오늘은 행운도 내 편인지 어디선가 교장선생님이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충성파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내게서 몸을 겨우 떼어낸 녀석은 입에 거품까지 물고 씩씩거리며 작은 눈을 부라렸다.
“개애새끼, 왜 제멋대로 와서 내 딱지, 왕딱지를….”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인 뒤 울먹이는 녀석을 약 올리기 위해 나는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끝까지 그의 흥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예상과는 달리 종수와 나는 바로 두 번째 결전으로 돌입하진 않았다. 녀석의 경계심도 굉장했지만 나 역시 몸싸움이 될 게 뻔한 싸움을 상대의 체력과 기술에 대한 정보도 없이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또 딱지 결전으로 쌓아놓은 내 이미지를 아이들이 덧칠해가며 자발적으로 퍼뜨리는 걸 지켜보는 기분도 짜릿했다. 나는 달디 단 사탕을 입안에서 굴려 빨듯 아이들의 환상을 즐겼다. 두 번째 싸움에 져 이 달콤함을 통째 뺏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전투욕 자체가 시들해졌다.
두 쪽 모두에서 붙을 기미가 안 보이자 아이들은 아예 상상의 날개까지 작동시켜 나를 멋있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 집 주변을 얼쩡거리는 애들도 많아졌다. 우리 가족이 국가 관련 기관임이 분명한 적산가옥에서 산다는 점도 매력으로 작용한 듯했다. 실제로 아이들 중엔 함평의 유지가 된 내 아버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녀석들도 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종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아냈다. 녀석은 함평 입구에 있는 큰 양조장 옆 널찍한 한옥에서 양조장 사장인 늙은 아버지와 그를 전혀 닮지 않은 젊은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건장한 청년인 형들도 셋 있는데 그들 중 하나는 기혼자라고 했다. 아이들은 종수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부자라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 그것이 내 아버지의 힘에 맞먹을 만한 힘이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내 주위를 맴도는 종수를 떠올릴 때면 가끔 머리털까진 아니어도 온몸의 솜털들이 곤두섰다. 본의 아니게 녀석이 차지했거나 차지할 뻔한 자리를 뺏은 것 같아 미안해지곤 했지만 반대로 내가 녀석의 밑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를 상상하면 식욕이 싹 가셨다. 공기의 냄새도 더 이상 쾌적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