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집엔 문이 많다 ⑤
마지막 기세를 부리는 햇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 걷자 시장 상가가 나타났다. 상가 입구엔 만물상들이 있었다.
가게 앞마다 마른 오징어와 미역, 나프탈렌, 타월 등이 교실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들 얼굴처럼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이곳에서만큼은 시골 특유의 나른함을 느낄 수 없다는 게 신기해서 나는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계속 걷자 주점들이 나타났다.
주점들 앞에 놓인 탁자마다 네댓 명의 중년 남자들이 앉아 있고, 탁자 한가운데엔 구형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갔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서로 닮아 보이는 중년 남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수런거리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모두 체포됐다는데?”
“어느 쪽이? 말을 할려면 정확히 좀 해!”
“아, 조용! 사람들, 답답하긴. 지금부터 내가 설명을 하지.”
나서기 좋아하고 바른말 하기 좋아하는 타입으로 보이는 남자가 라디오의 볼륨을 줄이고 일어서서 두 손을 허리에 척 걸쳤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어제 오후 장도영 중장님이 지시를 하셨어. 사병들한테까지 실탄을 지급하라고.”
“잠깐. 장도영?…. 그 사람 계엄사령관 했던 사람 아냐?”
“맞어. 그 뭐냐, 국가 재건 회의 회장도 했지.”
“아, 시끄러. 내가 지금 설명을 하고 있잖어? 그러니까, 사태는 이렇게 된 것이야. 장 중장은 5.16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는 동안만 군이 권력을 갖고 있다 민간인들에게 넘겨주자는 의견이고, 박 소장측은 자기들이 직접 정치를 하고 싶어 하고, 당연히 둘 사이가 나빠지고, 뭐, 친했던 사람들끼린 할 수 없는 생각도 하게 되고. 결국은 장 중장이 민간 정치인과 손을 잡고 박 소장을 없애려고 행동을 개시한 거지.”
“누가 정치를 하든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뭔 상관있나? 먹고 사는 거 고달프고 앞 캄캄하긴 마찬가지지. 아, 생각해봐, 우리가 언제 편했었어? 이승만 때도 장면 때도…. 에이, 난 차라리 군바리들헌테 한번 맡겨봤음 좋겠네.”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덩치가 작고 깐깐하게 생긴 또 다른 남자가 불에 덴 듯 화를 내며 일어섰다. 일장연설을 끝낸 남자 앞을 지나 좀 전에 썰렁한 말을 내뱉은 키 큰 남자에게 다가가는 그의 작은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아무리 살기가 고달파도 그런 줏대 없는 말은 하는 게 아니지. 사람이 밥만 먹고 살아? 입을 옷 있고 몸 눕힐 곳 있으면 다야? 사람한텐 자존심이란 게 있고 긍지란 게 있어. 국민을 바보로 알고 지 맘대로 북치고 장구치고 하던 이 박사 물러나고….”
나는 돌아섰다. 선택한 단어들만 다를 뿐 깐깐한 남자가 하는 말들이 오월 하순의 어느 날 만취해 귀가한 아버지가 5.16 직후 간부급 공무원들에게 배당된 마패 모양의 메달을 방바닥에 던지며 했던 말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던 아버지의 절망은 특유의 복잡함으로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너 같은 코흘리개가 세상일에 대해 뭘 알겠어? 하고 깔보는 기미마저 느꼈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열등감과 무력감은 떠올리기 싫다. 단지 한 가지, 가난해도 자존심만큼은 목숨같이 여기던 목포 사람들의 단호함을 이 시골 마을에서도 본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때 주점 아줌마가 새빨갛게 익은 수박 조각들이 수북한 쟁반을 들고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혼탁한 시장 공기를 단박에 환기시키는 달큼한 수박 향기가 내 두 발을 야무지게 묶어버렸다. 벌써 수박을 와삭, 베어 물고 열심히 씹고 있는 남자들이 주고받는 말들이 내 등을 간질였다.
“이번에 부임해 온 한전 출장소장 말야. 수긋해 뵈는 게 마흔다섯은 넘었을 것 같지?”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남자들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버지라는 걸 안 순간 식욕은 희미해져버렸다. 그러나 내가 출장소집 아들이라는 걸 알 리 없는 남자들은 내가 다가가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전 전신인 남선 전기 회사에서 영업주임을 했던 사람이라며? 이봐, 한 조각 더 먹어!”
“어어 뼛속까지 시워언허네. 근데 영업주임이면 전기세 수금하는 자리 아냐? 목포시 전체 전기세를 생각하면. 어이구, 힘깨나 썼겠는 걸. 그런데 왜 이런 시골로 밀려났을까?”
“아, 척하면 몰라? 혁명 공신인 퇴역 군인들이 옷을 벗으면 어디로 가겠어? 대한민국에 반듯한 직장이 몇 군데 있나? 옷 벗은 군인들이 한전 간부로 들어오면서 고향인 이곳으로 밀려났겠지.”
“낙하산 떨어지면 박힌 돌들 줄줄이 뽑혀 나와 저희끼리 피터지게 싸우는 게 다음 순서지. 안 그래?”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모르면 더 이상하다는 듯이. 나는 여전히 멍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좌천의 이유를 이곳에서 들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참 후 건포도처럼 파리한 입술을 가진 사십대 남자가 아직 거기 서 있냐고 묻는 듯한 눈으로 나를 봤다. 남자는 수박 한 조각을 내밀었다.
“옛다. 먹어라.”
어느새 내 손이 튀어나가 수박을 움켜쥐었다. 흐물흐물하던 식욕이 젤리처럼 선연해지더니 침까지 꿀꺽 삼키게 만들었다. 잠깐, 아주 잠깐 내 아버지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수박을 받아먹는다는 게 수치스러웠지만, 하찮은 일로 갈등하는 내가 너무 싫었지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너무 익어 그만 푸근해지려 하는 붉은 과육 위로 이빨을 박았다.
수박은,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