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집엔 문이 많다 ④
나는 앞을 보고 계속 걸었다. 읍 한복판에서도 목포 시내를 돌아다닐 때 느꼈던 활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식 단층집과 한옥들, 택시,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행인들로 가득한 목포 번화가를 그리워할 때 갑자기 전차를 닮은 큰 차가 덜컹거리며 내 앞을 지나갔다. 쓰러뜨린 통조림처럼 길고 창문이 많은 그 차의 꽁무니가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그것이 이사 온 날 출장소 직원에게 들은 궤도차라는 걸 알았다. 기차를 타러 역까지 가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그 차는 대절 택시와 함께 읍의 귀한 운송수단이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자 잠시 깨어났던 감각이 다시 마비되었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걷는데 이사 온 뒤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목포 집이 떠올랐다.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 잠이 깨 마당으로 나서면 막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볼 때가 많았다. 만져질 듯한 선홍색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르면 바다는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시선을 옮기면 상아빛 바위들로 꽉 찬 유달산은 연분홍색이 돼 있었고, 산자락을 허리띠같이 감싼 우리 동네는 꽃자주색이었다. 우리 집 마당에 핀 온갖 꽃들도 원래의 색깔 때문에 독특한 색이 돼 있었는데, 아마 그들 앞에 선 내 얼굴도 붉어져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퀭해지며 옛집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뒤이어 떠오른 또 하나의 풍경은 나를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몰고 갔다.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나와 언덕 위쪽으로 올라가면 한때 목포상과대학으로 쓰였다는 해병대 해군 주둔지가 있었다. 한창 병정놀이에 탐닉하던 내 또래 개구쟁이들은 흰 세일러복을 입은 해군들과 카키색 군복을 입은 해병대 군인들이 절도 있게 행군하는 모습을 보면 넋을 놓고 쳐다보곤 했다. 그 청년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을 똑같은 남자로 만들고 있는 제복도 세련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우리는 군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의욕적이고 앞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한낱 동네 개구쟁이에 불과했던 내가 5.16이라는 말을 실감한 것도 기껏 언덕 위나 오가며 습관적인 훈련을 하던 해병들이 목포 중심가를 오가며 도시를 통제하는 광경을 보고 나서였다. 멀리서 보면 장난감 병정 같은 청년들이 시청과 경찰서, 신문사 등을 지키고 있는 걸 본 아저씨들은 허, 계엄 떨어지자마자 방송국, 신문사부터 봉쇄해? 흥, 사람 말과 귀가 무섭긴 한가 보지, 하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들도 군인들 앞을 지나칠 때면 딴사람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 빨리 걸었다.
하지만 우리는 상관없었다. 우리의 우상들이 완전히 낯선 힘으로 도시를 지배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흥분했다. 그들의 힘이 우리 자신의 힘이라도 되는 것처럼. 군인들도 아이들은 별로 경계하지 않아서 눈치껏 그들의 동선을 좇아볼 수도 있었다. 그 틈에 한 녀석이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군모 하나를 훔쳐냈다. 그는 단박에 영웅 비슷한 남자가 돼버렸고, 나는 군모에 대한 갈망과 질투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결국 녀석이 충분히 즐겼다 싶었을 때 장난감 불자동차를 주고 군모를 손에 넣고야 말았다.
나는 당장 아이들을 몰고 이젠 텅 비어 있는 해군 주둔지 앞 언덕길로 나갔다. 몇 곳을 골라 급히 그려 만든 태극기를 꽂고 시청, 구청, 경찰서, 방송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장소마다 아이들을 부동자세로 세워놓고 작대기 총을 만들어 하나씩 쥐어주었다. 당연히 대장은 군모를 쓸 차례가 된 아이가 했다.
계엄군 놀이는 너무도 흥미진진하고 짜릿해서 우리는 날이 컴컴해지도록 언덕에서 살았다. 퇴근길의 아버지와 마주친 적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평소의 나라면 눈치 빠른 아이답게 아버지의 퇴근 전에 놀이를 끝내는 노력 정도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화 속 빨간 구두라도 신어버렸는지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어느 날 아버지는 사들고 온 젤리 봉지를 팽개친 뒤 내 머리에서 군모를 벗겨 땅에 던져버렸다. 아버지는 나를 당신 무릎 위에 엎어놓고 엉덩이를 마구 두들겨 팼다.
“대체 몇 날 며칠을 이 짓을 하는 거냐? 보는 것도 지겹다. 어떻게 된 게 시내에서나 골목에서나, 어른이나 애나 하는 짓이 다 똑같아. 아예 국화빵 틀로 찍어놨어. 대체 커서 뭐가 될래? 깡패가 될래? 도둑이 될래? 대답해! 대답 못 해?”
내 엉덩이를 으깨버릴 것 같은 아버지의 힘에 질렸는지 눈물도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몇 개월을 한순간에 살아낸 듯 살이 쑥 빠진 나는 군인놀이에 정이 뚝 떨어져버렸다. 몰래 놀 수야 있겠지만 다시는 그것만의 투명하고 쨍한 흥분을 느껴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주워서 깨끗이 닦은 군모를 낡은 장난감들이 담긴 상자에 넣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은 복잡했다. 그날 나는 아버지가 싫어하는 군인들의 힘과 나를 질리게 한 아버지의 힘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