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집엔 문이 많다 ③
내가 외면하자 엄마는 아예 내 주위를 돌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여섯시가 넘었는데 왜 퇴근을 안 하시지? 출근 첫날 당직을 맡을 리는 없고.”
나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이고 커터 칼로 왕딱지를 쿡쿡 찍어댔다. 그때 엄마가 다가와 흰 양말을 신은 발로 왕딱지 한 귀퉁이를 지그시 눌렀다. 나는 눈싸움을 각오하고 엄마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엄마의 눈은 다정하게 이봐, 아들. 어쩜 그렇게 오래 엄마의 걱정을 외면할 수 있지? 하고 묻고 있었다. 동쪽 문과 나를 번갈아보던 엄마는 기어이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해버렸다.
“수형아. 사무실 가서 아버지께 언제 퇴근하시는지 여쭤보고 와.”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 막내누나가 아닌 나인가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는 나보다 몇 배는 더 노련했다. 조용히 다가와 내 뒤통수를 골고루, 정성껏 쓰다듬어주는 엄마의 손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들, 아직도 그 이유를 몰라? 그거야 네가 워낙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또 믿을 만한 남자이니까.’
역시 엄마는 내가 무엇에 약한지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게 배역이 주어지면 그것에 나를 맞추려 애쓰는, 즉 칭찬을 받으면 칭찬받을 만한 남자가 돼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순진한 남자였다. 그러나 이 타협이 결코 쉽게 얻어진 건 아니라는 걸 상대가 알 수 있도록 뾰로통한 표정만은 유지한 채 쿵쾅거리며 동쪽 문 앞으로 걸어갔다.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한눈에 들어온 건 막 액자를 벽에 걸고 의자에서 내려서는 아버지의 옆모습이었다. 책상 위엔 붓과 벼루, 텅 빈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직접 액자 속의 글씨를 쓴 것일까?
아버지는 무너지듯이 검은 회전의자 위로 주저앉았다. 눈썹이 매섭게 휜 데다 윤곽이 너무 선명해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 때문에 얼굴도 조금 삐뚤어져 보이면서 그는 마음이 약하고 허점이 많은 남자로 보였다. 어떤 순간에도 아버지를 싫어할 순 없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나는 한 발 물러서서 액자를 올려다봤다. 실내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지만 흰 종이와 대비되는 먹빛이 워낙 진해서 혁명공약이란 큰 글씨와 그 밑의 작은 글씨들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1.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한다.
3.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품을 진작시킨다.
4.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
“옛날옛날 일본의 어느 외진 절 밑에 당고를 파는 가게가 있었단다. 밤 열두시가 넘어 가게 문을 닫으려 하면 꼭 젊은 애기 엄마가 당고를 사러 오는 거야. 그런데 매번 마을 쪽이 아니라 절 쪽으로 올라가더란다. 절엔 죽은 사람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묘지밖에 없는데 말야. 하루는 수상하게 여긴 가게 주인이 몰래 여자를 따라가봤어. 묘지 쪽으로 간 여자는 글쎄, 어떤 관 앞에 멈춰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관 뚜껑을 열고 사라져버렸단다. 다음 날 절 주지에게 그 말을 하자…. 그도 놀라면서 아, 며칠 전에 만삭인 젊은 여자의 관이 들어오긴 했는데, 하는 거야.”
“그럼 관 속에서 죽은 여자가 아기를 낳고 귀신이 되어 아기에게 먹일 당고를 사러 왔다는 거예요?”
“…. ”
“할머니. 내 말이 맞아요?”
벌떡 일어나 앉은 나는 이미 안방 문에 기대 앉아 졸기 시작한 할머니를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전 내내 함께 이불 빨래를 한 엄마도 낮잠에 빠져 있으니 이상할 건 없지만 조개가 호흡하듯 입을 벌리고 자는 할머니는 할머니 아닌 할머니의 지친 영혼 같았다. 나는 늘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온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 할머니 표 이야기의 분위기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얼른 안방으로 가 장롱 서랍에서 코발트색 셔츠를 꺼내 입었다. 지금이야말로 함평 읍내를 탐색해볼 절호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