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집엔 문이 많다 ①
드디어 우리 가족은 함평군 한전 출장소에 도착했다. 출장소 건물은 오는 길에 본 경찰서, 우체국과 똑같은 적산가옥이었다. 또 출장소 옆엔 단층짜리 일본식 주택이 있었다.
이미 나와 있던 몇 명의 직원이 아버지에게 깍듯하게 절을 했다. 역전에서부터 우리 가족을 안내한 직원이 눈앞의 건물들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었다.
“보시다시피 출장소와 사택은 문 하나로 연결돼 있습니다. 지은 지 오래 됐지만 튼튼하고 실용적인 건물들입니다. 보성으로 부임해 가신 이소장님께서 화초를 워낙 좋아하셔서 정원이 아름답습니다. 청소는, 저희가 해두었습니다.”
“음, 그래. 수고했네.”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 깐깐한 눈으로 ‘함평군 한전 출장소’라고 적힌 현판을 살펴봤다. 그때 한 떼의 사내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사택을 등지고 섰다. 좀 전에 본 아이들인지 출장소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표정은 한결 선명했다. 낯설고 위압적인 것을 볼 때의 얼떨떨함은 간 데 없고 호기심과 경계심, 희미한 적개심만이 눈매에 가득했다.
나는 가장 복잡한 표정을 가진, 즉 욕심과 불안의 충돌로 괴로워하고 있을 아이를 찾아봤다. 십중팔구 대장이거나 대장 비슷한 존재일 그런 아이는, 있었다. 키와 체격이 가장 크고 각기 다른 얼굴에서 떼다 붙인 듯 어색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는 소년. 빌려다놓은 물건 마냥 어정쩡해 보이는 그는 왠지 두뇌싸움에선 백전백패할 것만 같은, 즉 조종당하기 쉬운 성격으로 보였다.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소년에 대한 아이들의 충성도였다. 저 둘의 관계의 어떤 문의 어떤 틈을 찾는 데 얼마만 한 에너지를 들여야 할까? 근본적으로 우열과 서열에 민감해 촌스럽게 적개심부터 과장해 보이는 아이들이 천진한 호기심으로 물렁해진 아이들보단 적다고 판단할 무렵 출장소에서 젊은 남자 직원이 나와 아이들을 쫓아버렸다. 개나 닭, 오리를 내몰듯이.
나는 발로 돌멩이들을 툭툭 차며 아이들이 뒤통수에 달린 눈으로 나를 계속 관찰하는 걸 훔쳐봤다. 내 관심은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품위를 지켜낸 첫 대면에 흡족해하며 주위를 둘러봤을 때 아버지와 다른 식구들은 이미 출장소로 들어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따라 들어갈까 망설이다 사택 앞으로 갔다.
먼저 회색 양철 지붕을 인 목조 가옥을 감싼 담 주위를 돌며 문이 몇 개인지부터 살펴봤다. 문은 모두 네 개였다. 대문 하나와 작은 쪽문 세 개. 대문은 신작로 쪽으로 나 있었고, 집 안에서 볼 때 동쪽으로 난 문은 출장소로 통했다. 당연히 반대편 문은 옆집으로 통하고, 뒤쪽 문은 초가집들이 들어찬 비좁은 골목을 지나 광활한 연두색 논밭들로 연결돼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말썽을 피우고 달아나기에 딱 좋은 구조였다. 특히 집의 큼직한 열쇠 같은 뒤쪽 쪽문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출장소에서 나온 식구들과 함께 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우리를 맞은 건 전에 살던 사람들이 키우던 여름 꽃들이었다. 칸나, 달리아, 사루비아, 튤립. 암적색 대문을 등지고 선 그 주홍색 꽃들은 꼭 불꽃들 같아서 불붙은 성냥 한 개비만 던져도 집이 활활 타버릴 것 같았다. 썩지 말라고 콜타르를 발라 암갈색을 띤 목조 벽들이 어두워 보이지만은 않는 것도 바로 그 꽃들 때문이었다.
나는 장난감 상자를 껴안고 꽃들 옆을 지나다가 낑낑거리며 이불 보따리를 나르는 누나들을 돌아봤다. 문득 누나들이 진홍 루주를 바른 도톰한 여자 입술 같은 여름 꽃들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쌍꺼풀이 깊고 표정이 풍부해 내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셋째 누나는 만개한 칸나 같았다. 윤곽은 평범하지만 엄마를 닮아 키가 크고 피부가 유난히 고운 둘째 누나는 탐스러워 보였다.
다른 많은 평범한 처녀들처럼 우리 집 누나들 역시 늘 적게 먹으려고 애를 썼다. 식욕 자체가 없는 사람처럼 조금씩, 품위 있게 먹는 것은 옷을 예쁘게 갖춰 입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도 그들의 모든 몸짓에선 엄청난 식욕이 느껴졌다. 나는 밤마다 두 누나들이 거울 앞에 서서 흰 거즈 붕대로 가슴을 꼭꼭 조여 맨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의 젖가슴을 살짝 엿본 적도 있다. 예쁘지만 왠지 나약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그것들은 색다른 장식물 같기도 하고 작은 무덤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적당히 알이 베고 날씬한 그들의 종아리들은 너무 원기왕성해서 누군가 탕, 하고 총을 쏴주기만 하면 곧바로 세상 속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직원들과 함께 장롱을 들여놓고 나오던 아버지는 화단 돌 위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딸들을 올려다봤다. 탈진한 것 같기도 하고 깨끗해진 것 같기도 한 그는 평화로워 보였다. 어쩌면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누나들은 곧 꽃이라는 인상을 내게 준 사람은 바로 아버지라는 것을. 맞다. 그는 꼭 꽃을 보듯이 딸들을 봤다.
공식적으로 우리 집에서 가장 예쁜 여자인 큰누나가 팔자걸음을 걸었을 때도 그는 그것의 교정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고 했다. 사실 누나의 특별히 화려한 이국적인 얼굴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렇지 누나의 팔자걸음은 아버지만큼 심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전한 꽃이 가진 단 하나의 결함을 마음에 걸려 했다. 결국 그는 큰누나가 열 살이 되자 모종의 조치를 취했다. 서울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앙증맞은 에나멜 구두를 사와 딸에게 신긴 뒤 일직선 위를 똑바로 걷게 하는 연습을 시킨 것이다.
한 달간, 거의 매일 밤 열정적으로 연습을 시킨 보람이 있어서 큰누나는 적어도 아버지 앞에선 똑바로 걸어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그 사건 역시 가차 없는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아버렸다.
‘세상에, 그 덩치 큰 남자가 매일 조막만 한 계집앨 붙들고 씨름하는 꼴이라니. 내가 공부를 잘하네 못하네를 두고 난리를 치면 이해를 해요. 그깟 걸음걸이가 뭐가 중요하다고, 참. 혼자 보긴 아까운 가관이었죠!’
그때마다 나도 따라서 하하 웃긴 했지만 그 끝엔 어김없이 가슴이 시큰했다. 나는 그 이야기 속의 정성과 비슷한 정성을 받은 적이 없었다. 적어도 아버지에겐. 물론 내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달려드는 엄마가 있긴 했지만 그것으로 섭섭함이 줄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