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날개를 구해줘 ③
엄마는 목포역 앞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내렸다. 트럭을 타고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번갈아 달리는 일이 애초에 할머니에겐 무리였기 때문이다. 식구들은 함평역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지난 한 달 동안 아버지의 좌천이라는 심각한 사태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마 그것은 할머니의 인생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게, 엄마의 예리한 분석이었다.
“스물여섯 살에 남편을 잃고 다시 이십삼 년 뒤 스물아홉 먹은 맏아들을 잃으셨다더라. 두 양반 모두 결핵이었다나. 겪어선 안 될 일을 두 번이나 겪어서 그런가. 아예 뼛속까지 담담한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애. 나쁜 일 생겨 내가 파닥거릴 때마다 날 한심해하며 혀를 차시는데…. 생각해보렴. 그 순간만 화를 내버림 개운해져 다 잊는 사람이 그 한 번을 못 하니. 이러다간 내가 내 명대로 못 살지!”
엄마의 넋두리가 아니어도, 할머니는 내가 보기에도 특별했다. 할머니에겐 환히 웃을 만큼 좋은 일도 화낼 만큼 억울한 일도 또 울 만큼 슬픈 일도 없어 보였다. 할머니의 계란형 얼굴은 늘 백자 화병같이 희고 곱고 담담했다. 할머니는 승진에 실패한 둘째 아들을 말로 위로하려 하지도 않았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더없이 맑고 단단한 애정이 어린 눈으로 그의 모든 것을 바라봐주었을 뿐이다. 그 시선은 차츰 푸근하게 아들을 감싸주며 이렇게 속삭였다.
“얘야, 이것도 나쁘진 않아. 괜찮다…. 괜찮아.”
그럴 때면 신기하게도 아버지가 순해지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그것은 녹슨 새장 속에 갇힌 비둘기들과는 또 다른 순함이었다.
아담한 체격에 꼭 맞는 바다색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역사 안으로 총총히 사라진 뒤 남은 가족들은 다시 자리를 정했다. 아버지와 누나들 중 가장 영리하고 길눈 밝은 막내 누나는 첫 번째 트럭 앞 칸에 탔다. 물론 그 배치는 아버지가 자, 내 옆에 탈 사람, 하자마자 내가 재빨리 막내 누나를 추천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멋 내기 좋아하고 꾀도 샘도 많아 놀기에 좋은 상대들인 둘째, 셋째 누나와 함께 짐칸에 남고 싶었다. 또 포장 한 자락 없이 활짝 트인 짐칸에서 색다르게 노는 것은 꼭 해보고 싶었던 일들 중 하나였다.
목포를 벗어나자 공기가 달라졌다. 얼린 칠성사이다처럼 맑고, 시큰하고, 찡했다. 잠시 후 풀과 흙과 희미한 거름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지만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바람이 내 폐 속까지 불어온다는 느낌이 들었을 땐 온몸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나는 눈을 감고 두 팔을 수평으로 들어 올려봤다. 한참 후 눈을 떴을 땐 도로변의 나뭇잎들이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빛나지 않는 것이라곤 없는 오후였다.
어느새 누나들과 나는 소리 높여 팝송을 부르고 있었다.
위 워 왈칭 투게에더, 투 어 드리미 멜로디, 웬 데이 콜드 아웃 췌인쥐 파트너스, 앤 듀 왈츠드 어웨이 프롬 미…. 오오오 새애애드 무비, 올웨이즈 메잌 미 크라이, 오오오 새애애드 무비 올웨이즈…. 두비 두비 두비….
함평역 앞에서 두 팀으로 나뉘어졌던 우리 가족은 재회를 했다. 역 광장엔 출장소 상급 직원이 미제 군용 지프를 개조한 택시를 대절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엄마가 그 차에 올라탔다. 졸지에 트럭은 우리 형제들만의 놀이 공간이 돼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대로 놀아보진 못했다.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릴 때의 독특한 리듬이 나를 계속 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몸이 마비 상태에 빠져드는 듯 불쾌하고 나른하기까지 했다.
멀리 읍내 풍경이 보일 때쯤에야 겨우 감각이 돌아왔다. 일제시대의 적산가옥에 들어앉은 관공서들과 초라한 상점들, 호수 다방, 대폿집을 지나쳤을 때 주택가의 담장들 위로 기어 나온 선홍색 넝쿨 장미들이 보였다. 이 시골에선 사치스러워 보이는 그 꽃들이 흑백사진 위에 뿌려진 빨간 물감 방울들처럼 엉뚱해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꽃들 아래로 검고 탱글탱글한 시골 아이들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담에 기대서서 낯선 공기를 듬뿍 묻힌 트럭이 지나가는 걸 보는 아이들은 자연의 일부인 듯 풋풋했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라도 받았는지 차려 자세로 서있는 그들의 단순함이 나를 뒤흔들더니 모든 감각들이 한꺼번에 깨어나게 했다. 혈관 속으로 뜨겁고 신선한 피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함평행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한 이유들 중 하나가 저 순수하고 충직해 뵈는 소년들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들과 겪게 될 재미와 감동, 고통에 대한 기대만으로도 나는 함부로, 벙글벙글 피어날 것만 같았다. 자칫 아버지 앞에서 빨간 장미같이 생뚱맞은 존재가 돼버릴까 봐 표정 관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아마 내게 집중하고 있는 저들에게도 지금의 내 인상은 중요할 것이다. 나는 소년다운 호기심을 내 안 깊숙이 감춰두고 장교다운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 위해 갈매기 모양의 눈썹 꼬리를 한껏 추켜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