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린다』연재를 시작하며
유년이란 무엇일까요?
조금 까마득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의 저는 말이 없고 공상 가득한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까지 꽤 먼 길을 걸어 다녔는데 지루했던 적은 없습니다. 내가 지나치는 길 주변의 인상적인 집들 안에선 내가 상상해서 만든 사람들이 살고 있었거든요. 고독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은 노인도 있었고, 죽을 것 같은 사랑 끝에 결혼에 골인해 너와 나도 구분 못 하고 사는 신혼부부도 있었고, 피아노만 껴안고 사는 병약한 천재 소녀도 있었습니다. 저는 분홍 가방을 멘 채 길 양쪽을 두리번거리며 그 사람들의 하루 일과를 창작하곤 했습니다. 나중엔 진짜로 사는 사람들이 와락 창문을 열어젖히거나 대문을 열고 튀어나올까 봐 도망치듯 빨리 걷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달린다』는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성장 소설입니다. 제 소설에 그 무엇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빛과 탄력, 환상의 아우라가 담겨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나친 욕심일까요?
또 이 소설은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남태평양의 어떤 작은 섬엔 아라페쉬 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다소 미개한 사회답게 남자는 여자보다 지적이고 유능하다는 편견이 있는 모양입니다. 똑똑한 남자들은 결혼하기 위해 꽤 많은 것을 감수합니다. 사춘기를 넘긴 아라페쉬 소년은 예닐곱 살가량의 소녀를 집에 데려와 가족과 함께 키웁니다. 장차 제 아내가 될 소녀를 먹이기 위해 그는 직접 얌을 기르고 사고야자를 재배하고 고기를 사냥합니다. 나중에 그가 아내의 부주의함이나 게으름을 질책할 수 있다면 그건 그가 그녀를 법적으로 소유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먹여서 키웠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생략한 부부들은 그다지 유대가 강하지 않다고 합니다. 시대착오적인 관습이지요?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여성들도 많겠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기 불황기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원초적 야만성을 회복해버린다고 합니다. 또 영국에선 커리어우먼 엄마 밑에서 성장한 아가씨들이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 하고 선언하는 경우도 많답니다. 초경이 비치면 오두막에 들어가 단식하며 제 성(性) 곱씹는 아프리카 여자들처럼 살고 싶어 하는 거지요.
참, 남자의 인생도 여자의 인생도 여전히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세상일에 관심이 많고 욕망이 강한 아이들이 있습니다.(저 같은 공상파는 아니겠지요) 고달프고 칙칙한 세상사가 뭐가 좋은지 열심히 엿보고 흉내 내며 리허설을 해보는 아이들… 하다 보면 심각하다 못해 처절해지는 그 리허설이 싸움에 요긴한 근육을 키워줄지 치명적인 상처만 안겨줄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이 소설은 그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리허설의 기록입니다.
윤효는
1995년『소설과사상』에 단편「새」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으로 『허공의 신부』와『베이커리 남자』가 있고 1997년『문학동네』에 시를 발표하며 시집 『게임테이블』을 출간하였다. 장편소설로 『노러브 노섹스』가 있고 테마 소설집 『서른 살의 강』과 『꿈꾸는 죽음』을 공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