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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에서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식구들은 가을이 되서야 알아차렸다. 새벽에 사과나무 주변을 빙빙 돌면서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아버지도, 일주일에 한 번씩 마당 한켠에 있는 아홉 개의 항아리를 닦던 할머니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태어난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과연 행복인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하던 고모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출근길에 가끔씩 가지를 꺾던 작은삼촌도 몰랐다. 작은삼촌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나뭇가지를 지휘자처럼 저으며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그 모습을 본 어느 여자가 작은삼촌을 예술가일 것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작은삼촌이 나타날 때까지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고는 했다. 할머니는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고 말했다. 식구들이 마당에 앉아서 고기를 구워먹던 옛 일이 생각날 때면 할머니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해서 나무에 듬뿍 물을 주곤 했었다. “하지만 올해는 한 번도 안 했어. 내가 뭐에 정신이 팔렸는지.” 동네 할머니들과 이박삼일로 설악산 여행을 다녀온 뒤로 할머니는 옆 골목에 사는 피아노 할머니네로 자주 놀러 다녔다. 할머니는 식구들과 심심풀이로 고스톱을 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그렇게 고스톱을 잘 치는 줄은 몰랐다. 외할머니의 돈을 딸 때도 그저 운이려니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박삼일 동안 한 달치 용돈보다 더 많은 돈을 고스톱을 쳐서 땄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할머니는 정확히 반을 떼어서 많이 잃은 사람 순서대로 돈을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새로 한 이가 맞지 않아서 여행 내내 음식을 제대로 못 먹었던 박 할머니가 피아노 할머니 집에서 매일 고스톱판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얼마나 땄는데?” 작은삼촌이 물었다. 할머니는 니들이 주는 용돈은 한푼도 안 쓰고 저금을 했단다,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 할머니는 피아노 할머니가 되었어?” 고모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고모의 기억에 의하면 그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응, 그 여편네가 자기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고 우리한테 거짓말을 했거든.” 할머니는 그 거짓말을 모두가 속아주는 척했다고 말했다. 피아노 할머니는 알코올중독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어느 중소기업 사장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모두들 집을 비울 때면 몰래 피아노를 쳐보곤 했다고, 독학으로 동요 몇 곡은 칠 수 있게 되었다고, 피아노 할머니가 술을 먹고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고모는 요리프로그램에 나간 뒤로 너무 바빠서 집에 돌아오면 세수하는 일조차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여학생이었을 때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같은 책을 읽고는 나무 아래에 앉아 몇 시간이고 비밀이야기를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고모와 어머니는 요리 프로그램에 나가 현란한 칼솜씨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저 외할머니의 뒤에 서서 외할머니가 족발 삶는 것을 지켜봤을 뿐이다. 방송이 나간 뒤로 거기 위치가 어디죠? 라고 묻는 전화가 자주 걸려왔다. 아버지는 낡은 중고차 한 대를 산 뒤 전국을 돌아다녔다. “내가 쟤를 임신했을 때 뭘 잘못 먹은 게 틀림없어.” 할머니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말했다. 어머니는 가게 일을 하랴, 가끔 아버지를 따라 여행을 다니랴, 그리고 아주 가끔 집안 청소를 하랴, 늘 바빴다. 게다가 공부 못하는 나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한숨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작은삼촌은 버스정류장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이상한 여자 때문에 악몽 같은 여름을 보냈다고 말했다. “왜 생긴 건 참하던데.” 고모는 작은삼촌이 긴 생머리의 여자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매일 소설 책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여자야. 그 여자를 여섯 번쯤 만났는데, 아버지 직업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다니까.” 하지만,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할머니는 혼자 저녁을 먹는 날이 많아졌다. 밥을 하는 게 번거로운 날이면 찬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 밥을 먹었다. 반찬은 오이지무침 한 가지였다. 사과나무는 거실에 앉아 연속극을 보면서 밥을 먹는 할머니의 등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새벽마다 마당에 나와서 한숨을 쉬는 아버지도, 가끔씩 맨발로 아침이슬이 내려앉은 마당을 걷는 나도, 술이 얼큰하게 취해 나무 밑동에 오줌을 누면서 무슨 말인지를 중얼거리는 작은삼촌도, 사과나무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열매를 따기 위해 까치발을 해야 하는 아이가 있는 집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무 끝에 달린 잎을 만지고 싶어서 폴짝 뛰는, 그러나, 닿을 듯 말 듯 번번이 실패를 하는 그런 아이가 있는 집에서 싹을 틔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