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요.” 편집장은 말했다. 신입직원은 아버지의 책을 만드는 동안 잘 팔리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을 했고 그래서 소화불량에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주일 만에 2쇄를 찍으면서 더이상 소화제를 먹지 않게 되었다. 작은삼촌은 자신이 사고 싶은 차를 사기 위해서는 삼만 권의 책을 팔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동안 모아둔 자동차 카탈로그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형, 책이 잘 팔리면 집수리나 하자.” 작은삼촌은 말했다. 집은 점점 낡아졌고, 겨울을 나기가 힘들 정도로 난방상태가 좋지 않았다. 집에서도 내복을 입고 있어야 하다니. 작은삼촌은 내복을 볼 때마다 아직 삼십대인 자신이 폭삭 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작은삼촌에게 인세는 어머니 통장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삼촌. 아빠는 자전거 한 대도 못 사줄 걸요.”
주말이면 우리들은 지방의 서점으로 사인회를 하러 다녔다. 네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간 어느 도시에서는 겨우 열일곱 명에게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사인회가 끝나면 우리들은 텔레비전에 나왔다는 맛집을 찾아가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 저녁 밥값에, 어머니 대신 가게 일을 하는 작은삼촌에게 주어야 하는 일당에, 또 새로 산 옷값에……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전국 여행을 다니겠냐고 아버지는 말했다. 어머니도 그건 맞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 지도를 보고 맛집을 찾아가는 부모님을 보면 두 분이 어떻게 여행을 했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멈추어서 아버지는 오른쪽이겠지? 하고 물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마도, 하고 대답했다. 굳이 갈림길에 서서 그렇게 묻지 않아도 될 정도로 쉬운 길에서도 그렇게 묻고 답했다. 마침내 찾고 있던 목적지에 도착을 하면 그 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내가 어릴 때 보던 만화의 한 장면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바닥이 부딪치는 순간, 두 분의 다리가 공중에서 오 센티미터는 뜬 것처럼 보였다. 몇 달 후, 정말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들의 발이 공중에서 오 센티미터 정도 뜨는 것을 보게 되지만.
독자들은 아버지에게 그 많은 곳을 다니시다니 대단해요, 하고 말을 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저도 생각보다 겁쟁이인 걸요.”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가 겸손하다고 말을 했지만, 실제로 아버지는 겁쟁이였다.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입학할 초등학교에 재래식 화장실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밤마다 화장실에 발이 빠지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아버지의 요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아래층으로 떨어질까봐 유리창 청소를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연애를 할 적에 한 번도 집까지 바래다준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당신네 집 골목길은 너무 무서워,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바래다주고 혼자 돌아올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오래 여행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횡단보도가 없는 팔차선 도로를 건널 때면 아버지는 낯선 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죽는 것만큼 슬픈 죽음은 없다고 생각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맛볼 때도 아버지는 낯선 나라에서 식중독으로 죽는 것만큼 비참한 죽음은 없다고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길을 건널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물을 마실 때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러다보니 저녁이 되면 피곤했고 아홉시가 되기도 전에 곯아떨어졌다.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보면, 늘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었고, 그러면 아버지는 마치 자신이 죽은 후의 세계를 미리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독자들에게 그 느낌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지만 정확히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해서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인을 해달라고 책을 내미는 독자들에게 너무나 평범하게 ‘행복하세요’라고 적었다. 더 멋진 구절을 적고 싶었지만, 여행기의 첫 문장을 썼다 지웠던 그 많은 날들처럼, 적당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행복하세요, 라고 적을 때마다 내가 이렇게 진부한 사람이었다니, 하고 아버지는 생각했다.
주말이면 우리들은 지방의 서점으로 사인회를 하러 다녔다. 네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간 어느 도시에서는 겨우 열일곱 명에게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사인회가 끝나면 우리들은 텔레비전에 나왔다는 맛집을 찾아가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 저녁 밥값에, 어머니 대신 가게 일을 하는 작은삼촌에게 주어야 하는 일당에, 또 새로 산 옷값에……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전국 여행을 다니겠냐고 아버지는 말했다. 어머니도 그건 맞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 지도를 보고 맛집을 찾아가는 부모님을 보면 두 분이 어떻게 여행을 했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멈추어서 아버지는 오른쪽이겠지? 하고 물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마도, 하고 대답했다. 굳이 갈림길에 서서 그렇게 묻지 않아도 될 정도로 쉬운 길에서도 그렇게 묻고 답했다. 마침내 찾고 있던 목적지에 도착을 하면 그 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내가 어릴 때 보던 만화의 한 장면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바닥이 부딪치는 순간, 두 분의 다리가 공중에서 오 센티미터는 뜬 것처럼 보였다. 몇 달 후, 정말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들의 발이 공중에서 오 센티미터 정도 뜨는 것을 보게 되지만.
독자들은 아버지에게 그 많은 곳을 다니시다니 대단해요, 하고 말을 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저도 생각보다 겁쟁이인 걸요.”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가 겸손하다고 말을 했지만, 실제로 아버지는 겁쟁이였다.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입학할 초등학교에 재래식 화장실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밤마다 화장실에 발이 빠지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아버지의 요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아래층으로 떨어질까봐 유리창 청소를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연애를 할 적에 한 번도 집까지 바래다준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당신네 집 골목길은 너무 무서워,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바래다주고 혼자 돌아올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오래 여행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횡단보도가 없는 팔차선 도로를 건널 때면 아버지는 낯선 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죽는 것만큼 슬픈 죽음은 없다고 생각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맛볼 때도 아버지는 낯선 나라에서 식중독으로 죽는 것만큼 비참한 죽음은 없다고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길을 건널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물을 마실 때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러다보니 저녁이 되면 피곤했고 아홉시가 되기도 전에 곯아떨어졌다.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보면, 늘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었고, 그러면 아버지는 마치 자신이 죽은 후의 세계를 미리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독자들에게 그 느낌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지만 정확히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해서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인을 해달라고 책을 내미는 독자들에게 너무나 평범하게 ‘행복하세요’라고 적었다. 더 멋진 구절을 적고 싶었지만, 여행기의 첫 문장을 썼다 지웠던 그 많은 날들처럼, 적당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행복하세요, 라고 적을 때마다 내가 이렇게 진부한 사람이었다니, 하고 아버지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