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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가게는 음식 대결을 펼치는 요리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었다. 작은삼촌의 친구인 홀쭉이는 외할머니의 족발을 한번 먹어보고는 단골이 되었고, 그래서 종종 여자를 데리고 가게로 왔다. 홀쭉이의 여자친구는 외할머니를 볼 때마다 늘 그 동안 잘 계셨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외할머니는 일 년이 지나서야 그 여자가 퀴즈 프로그램의 작가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외할머니는 직접 주방으로 들어가 비빔국수 두 그릇을 비볐다. “이건 서비스요.” 외할머니가 두 사람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작가는 비빔국수를 먹다가, 우리 엄마가 해주던 맛과 똑같아요, 하고 말했다. 외할머니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우리 사돈은 아직도 퀴즈 실력이 좋다오.” 하지만 작가는 퀴즈 프로그램을 그만두었다. 가을개편부터 새로 시작하는 요리 프로그램의 메인작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만약 족발에 대해 방송을 하게 되면 반드시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날부터, 어머니와 고모는 칼질을 연습했다. “방송에서 보니까 일류 요리사들의 칼질은 예술이더라고요.” 어머니와 고모는 무를 일정한 크기로 채를 치는 연습을 했다. 어머니는 자주 손을 베었고, 아버지는 밤마다 반창고를 갈아주면서 화를 냈다. 여행을 다닐 적에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심지어 뜨거운 음식을 먹기 전에도 늘 조심해, 라고 말을 하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조심해, 하면 어머니는 늘 고마워, 하고 대답하곤 했다. 어머니는 화를 내는 아버지가 고마웠고,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어머니는 꽤 오랫동안 아버지가 지겹다는 생각을 했었다. 잠을 자다가 아버지의 숨소리가 느껴지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리곤 했다. 특히 외출을 하지 않는 날이면 낮에도 입고 있는 잠옷이 어머니는 너무나 지겨웠다. 어머니는 잠옷에 새겨진 곰돌이 푸우마저도 지겨웠는데, 자기 배만한 꿀단지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 미련 맞아 보였다. 게다가 아버지의 배는 점점 푸우를 닮아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새 잠옷을 선물했다. 아버지는 그 잠옷을 입어보고는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살이 쪘는지를 깨달았다. 어머니가 사준 잠옷은 한 치수가 작았고,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허리를 잡아당겨 고무줄을 늘려야 했다.
아버지의 책은 서너 군데에서 출판을 거절당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유명 작가들도 다 그렇게 출판을 거절당하곤 했다고 식구들에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선생님이 그랬어요.” 아버지의 노트북에는 글쓰기를 가르쳐주던 백화점 문화센터의 선생님이 했던 말들이 적혀 있었다. 하나같이 멋진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 멋진 말들이 모두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는 것은 몰랐던 아버지는 글쓰기 선생님이 한 말은 모조리 믿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글쓰기 선생은 저도 서른 번도 넘게 신춘문예에서 떨어졌어요, 하고 고백을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서른 번도 넘게 떨어진 사람도 있는데 걱정 마세요, 하고 말했다. 고모는 아버지에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서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거기에 가면 여행책들도 많더라고.” 그래서 아버지는 고모가 알려준 도서관으로 갔다. 비탈진 언덕을 오르자 숨이 가빠왔고, 그러자 허리가 꽉 끼는 잠옷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여행코너에 서서 저자 이름이 ㄱ으로 시작하는 책들을 모조리 꺼냈다. 가장 먼저 저자의 사진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구릿빛 피부에 단단한 몸매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수첩에 책을 내기 전에 뱃살을 뺄 것이라고 썼다. 아버지는 마음에 드는 책들을 골라냈고, 그 책을 낸 출판사들의 주소를 수첩에 적었다. 특히, 여행 관련 책을 다섯 권 이상 낸 출판사들을 골라냈다. 우선, 열 군데의 출판사에 먼저 원고를 보냈다. 사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칼라프린트로 인쇄를 해야 했고 프린트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아버지의 원고는 대부분 이면지로 재활용되었다. 하지만 어느 출판사의 신입직원이 교정을 보다가 아버지의 원고를 발견했다. 신입직원은 교정을 볼 때면, 뒷면에 어느 글이 인쇄가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다. 지난 원고의 교정지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걸 보다가, 뒤늦게 오자를 발견하고는, 혼자 마음 졸인 적도 있었다. 신입직원은 지루한 프랑스 소설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 옆자리 선배가 점심 먹으러 가자, 하고 신입직원의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 직원은 교정을 보던 원고를 뒤집어두었다. 누군가 자신의 작업을 보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자장면을 먹고 돌아온 신입직원은 커피믹스를 두 봉지나 타서 자리에 앉았다. 커피잔을 뒤집어둔 원고에 올려놓고 신입직원은 맨손체조를 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커피잔을 들었는데 원고지에 동그랗게 커피 자국이 남았다. 직원은 휴지로 커피 자국을 닦으면서 이면지의 원고를 읽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진이 거기 있었다. “내가 이걸 어디서 보았지?” 신입직원은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거기에도 사진이 있었다. 대학 때 사진반에서 취미활동을 했던 신입직원은 그 사진이 결코 잘 찍은 사진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진들이 이상하게 하나의 정지화면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 앞의 이야기와 그 뒤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신입직원은 지루한 프랑스 소설을 읽는 것을 멈추고, 모든 이면지를 뒤져서 아버지의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