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옷장에서 사과상자를 꺼냈다. 앨범은 모두 세 권이었다. 외할머니를 닮은 사람을 찍은 사진을 제외하고는 부모님이 보내준 모든 엽서가 다 들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외할머니가 화가 나서 그 사진을 찢어버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앨범을 들여다보면서 그런데 무슨 순서대로 사진을 꽂은 거니, 하고 물었다. 당연히 날짜 순서대로 앨범을 정리했을 거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두번째 장에 꽂힌 엽서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내가 마지막으로 찍은 건데.” 나는 엽서가 도착한 순서대로 정리를 하는 것은 오래 전 일이었다고 말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나는 사진들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사진들을 네 개씩 짝지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는 했다. “내가 수학을 잘 못하지만, 암튼, 그렇게 하면 수백 가지의 경우가 생기잖아요.” 나는 아버지에게 덕분에 심심하지 않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네가 조금 더 컸으면 같이 다녔을 거야, 하고 변명을 했다. 내가 일부러 아버지 앞에서 어깨를 구부린다는 것을 아버지는 아직 몰랐다.
아버지는 내 앨범을 보다가 새로운 생각이 하나 더 떠올랐다. 책에 실을 엽서를 고르는 일을 나와 함께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보낸 엽서들로만 이루어진 책을 만들겠다고 했다. 사진 뒷면에 쓴 편지글과 낯선 나라의 우표와 우체국 소인만으로도 충분히 여행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가게 문을 닫고 집에 돌아오면 우리 세 가족은 넓은 식탁에 둘러 앉아 사진들을 골랐다. 어머니가 고른 사진과, 아버지가 고른 사진과, 내가 고른 사진이 제각각이었다. 식탁에 늘어놓은 사진 때문에 상을 펴고 바닥에 앉아서 밥을 먹어야 했다. 할머니는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일부러 아이고, 소리를 크게 냈다. “반드시 셋이 공동 저자여야 해. 당신 이름으로만 책을 내기만 해봐.” 어머니는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셋이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매일 밤마다 싸우자 마침내 고모가 나서서 한 가지 제안을 냈다. “책을 3부로 나누어서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서 1부는 아버지가 고른 사진을 2부는 어머니가 고른 사진을 싣기로 했다. 아버지는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들의 사진을 위주로 골랐다. 물론, 여행지에서 처음으로 만난, 투신자살을 한 여자 때문에 죽을 뻔한 남자의 사진이 가장 첫 장에 실렸다. 나와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에 태어난 남자아이의 사진도 골랐다. 나는 시차가 있는데 어떻게 똑같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 물었다가 그냥 믿어라,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라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이 볼 수 있는 풍경들을 골랐다. 빨랫줄에 걸린 빨래, 교복을 입고 친구를 기다리는 소녀, 관중이 한 명도 없는 운동장에서 야구경기를 하는 아이들, 혼자 시소를 타는 남자아이, 바람에 홀로 흔들리는 그네…… 나는 사진을 뒤집어보지 않아도 그 뒤에 적힌 글들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이응이 찌그러지지 않고 동그란 것은 모두 어머니의 글이었다. 아버지가 여행기를 쓴다고 했을 때 나는 솔직히 어머니가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나를 감동시킨 글은, 교과서에 실린 글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낀 글은, 모두 이응이 찌그러지지 않은 글씨였다. 나는 3부를 맡았다. 나는 나라별로 한 장씩 사진을 골랐다. 가까운 나라 순서대로 사진을 배열하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사진만으로 세계 일주를 한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나는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우리 집 대문을, 아직 할아버지의 문패가 걸려 있는 대문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내 이름이 새겨진 빵 봉지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일요일 날, 외할머니의 가게에 가서 설거지를 도와드리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외할머니의 손등을 찍었다. 그 세 장은 3부의 마지막에 실린 사진들이었다. 하지만, 소인이 없는 것은 그냥 사진일 뿐 엽서가 아니라며 아버지는 책에 실을 수 없다고 우겼다. 나는 대문을 찍은 사진은 아버지에게, 빵 봉지를 찍은 사진은 어머니에게, 그리고 외할머니의 손등을 찍은 사진은 내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우표 세 장을 샀다. 삼 일 후에, 소인이 찍힌 사진 세 장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이제 됐죠?”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