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저녁마다 어머니의 다리를 주무르면서 손님이 많아서 다행이야, 하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본심은 달랐다. 손님으로 북적이는 가게를 보면서 아버지는 장사가 잘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비굴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요가학원에 등록을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퀴즈 대회에 떨어진 이후로 신문의 십자말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엽서에 정답을 적어 보냈지만 드라이기 하나도 상품으로 받지 못했다. 고모는 앞머리가 조금씩 빠지기 시작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가게에 배달을 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생각했던 것보다 가게는 장사가 잘 되었지만 고모가 생각하는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게가 너무 작아서 아무리 손님이 많아봤자 버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수입을 나누다보니 고모의 앞으로 떨어지는 돈은 많지 않았다. 몇몇 손님이 빈자리를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가던 어느 날, 고모는 외할머니에게 배달을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사돈아가씨. 난 반대예요. 아이가 학교 갔다 돌아왔을 때 부모 중 한 명은 집에 있어야 해요. 난 꼭 우리 손자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어요.” 어머니는 더더욱 반대를 했다. “오토바이는 너무 위험해요, 아가씨.” 하지만 아버지는 고모에게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이러다가 십오 평짜리 족발가게에 온 식구들이 일을 하게 되는 거 아닌가. 아버지는 낯선 나라에서 식당을 차린 이민자 가족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러자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한 이방인이 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의 뒷골목을 돌아다녔을 적에도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이었다. 아버지는 오토바이 가게로 가서 스쿠터를 빌렸다. 헬멧을 쓰고 팔목 보호대까지 찬 다음 아버지는 스쿠터를 몰고 아무 길이나 달렸다. 눈에 보이는 간판들이 몸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입을 크게 벌려 공기를 들이마셨다. 횡단보도에서 하품을 하며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이, 쓰레기 더미에 묻혀 있는 바람 빠진 축구공이, 귀퉁이가 깨진 어느 가게의 입간판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스쿠터의 속도를 내면 낼수록, 소리는 점점 사라지고 풍경은 점점 커졌다. 마침내, 아버지는 외할머니의 족발가게에 도착했다. 헬멧을 쓴 채 가게로 들어선 아버지는 난 배달은 하지 않겠어, 하고 말했다. “마침내 알았어. 왜 글이 안 써졌는지.” 아버지는 주방으로 들어가 족발을 삶던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말이 너무 많았던 거야.”
스쿠터를 타다가 아버지는 왜 매번 첫 문단에서 글쓰기를 멈추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비행기를 탄 순간부터 다시 돌아올 때까지를, 아니 큰삼촌의 죽음에서부터 할아버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풍경들은 거기에 있었다. 연결되지 않은 채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어떤 글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부모님은 사진을 찍고, 엽서를 만들고, 아들에게 전해줄 단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샜다. “그거면 되는 거 아니야, 여보. 우리가 할 말은 거기 다 있었잖아.”
아버지는 내게 그 동안 보냈던 엽서를 돌려달라고 했다. 나는 75점을 받은 수학시험지가 들어 있는 책가방을 벗어던지며 화를 냈다. “그건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부모님이 긴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 나는 엽서를 모아둔 앨범들과 내 이름과 같은 이름이 새겨진 빵 봉지를 사과상자에 담아서 옷장 깊숙한 곳에 감추어두었다. 사과상자를 테이프로 밀봉을 하면서 나는 훗날 내 아이가 생길 때까지 그 상자를 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 사진들은 내가 찍은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책가방을 발로 걷어찼다. 나는 화가 난 이유가 아버지 때문인지, 수학점수 때문인지, 아니면 하굣길 버스에서 만난 어느 여학생이 여드름 좀 봐, 하며 비아냥거린 말 때문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저 화가 난다는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화를 내는 나를 보면서 너무 까마득해서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중학생 시절의 자신을 생각해보았다. 연년생인 세 동생들은 사소한 것 가지고도 자주 싸웠고 그래서 집은 늘 시끄러웠다. 그래서 아버지는 제대로 화 한번 내보지 못하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차는 김에 이것도 차라.” 아버지는 코가 뭉개진 낡은 곰 인형을 던졌고, 나는 발로 걷어찼다. 할아버지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볼 때 베개 대신으로 사용했던 곰 인형이었다. 아버지는 옆구리가 터진 곰 인형을 쓰레기 봉지에 담았다. 그러고는 내게 쥐어주면서 말했다. “갔다 버리고 와. 마당에서 심호흡 한번 하고.”
스쿠터를 타다가 아버지는 왜 매번 첫 문단에서 글쓰기를 멈추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비행기를 탄 순간부터 다시 돌아올 때까지를, 아니 큰삼촌의 죽음에서부터 할아버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풍경들은 거기에 있었다. 연결되지 않은 채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어떤 글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부모님은 사진을 찍고, 엽서를 만들고, 아들에게 전해줄 단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샜다. “그거면 되는 거 아니야, 여보. 우리가 할 말은 거기 다 있었잖아.”
아버지는 내게 그 동안 보냈던 엽서를 돌려달라고 했다. 나는 75점을 받은 수학시험지가 들어 있는 책가방을 벗어던지며 화를 냈다. “그건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부모님이 긴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 나는 엽서를 모아둔 앨범들과 내 이름과 같은 이름이 새겨진 빵 봉지를 사과상자에 담아서 옷장 깊숙한 곳에 감추어두었다. 사과상자를 테이프로 밀봉을 하면서 나는 훗날 내 아이가 생길 때까지 그 상자를 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 사진들은 내가 찍은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책가방을 발로 걷어찼다. 나는 화가 난 이유가 아버지 때문인지, 수학점수 때문인지, 아니면 하굣길 버스에서 만난 어느 여학생이 여드름 좀 봐, 하며 비아냥거린 말 때문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저 화가 난다는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화를 내는 나를 보면서 너무 까마득해서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중학생 시절의 자신을 생각해보았다. 연년생인 세 동생들은 사소한 것 가지고도 자주 싸웠고 그래서 집은 늘 시끄러웠다. 그래서 아버지는 제대로 화 한번 내보지 못하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차는 김에 이것도 차라.” 아버지는 코가 뭉개진 낡은 곰 인형을 던졌고, 나는 발로 걷어찼다. 할아버지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볼 때 베개 대신으로 사용했던 곰 인형이었다. 아버지는 옆구리가 터진 곰 인형을 쓰레기 봉지에 담았다. 그러고는 내게 쥐어주면서 말했다. “갔다 버리고 와. 마당에서 심호흡 한번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