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퀴즈 프로그램에 나간다고 말을 했을 때, 작은삼촌은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백과사전을 팔아 영화를 보러 갔던 일이 생각났다. 두 형들은 서로 말이 잘 통했다. 작은삼촌은 그 사이에 끼지를 못했고, 그때마다 창고에 들어가 낡은 물건을 뒤져가며 혼자 놀았다. 사전은 사다리 아래에 있었는데, 삼촌은 사다리의 아래칸에 앉아서 밑줄이 그어진 사전을 읽었다. 사전은 여기저기에 메모가 적혀 있었다. 한 자리 국번으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라든지 친척의 결혼식 날짜 같은 것들이었다. 아마 책을 읽다가 전화가 왔을 때 적어둔 것이리라. ‘ㄹ과 ㅁ’ 사이에는 코스모스꽃이 끼워져 있었다. 종이에 흐릿하게 분홍색 물이 들어 있었다. 작은삼촌은 고물장수에게 백과사전을 판 후, 문방구로 달려가 코스모스꽃을 코팅해서 책갈피로 만들었다. 어버이날 할머니에게 그 책갈피를 선물했고, 할머니는 가을도 아닌데 코스모스꽃을 어디서 구했는지 신기하다며 웃었다. 작은삼촌은 엄마 드리려고 작년 가을에 따둔 거예요, 하고 거짓말을 했다. 문방구에서 책갈피를 만든 돈을 제외하고 나머지 돈은 전부 학교 앞 지하실에서 불법으로 상영하는 영화를 보는 데 썼다. 작은삼촌은 영화 속 주인공을 흉내낸다며 이층에서 뛰어내렸고 다리가 부러졌다. 작은삼촌은 퇴근길에 시사상식 문제집을 사왔다. “엄마는 잘하실 거예요.” 작은삼촌이 문제집을 드리자 할머니가 이 나이에 머리에 들어갈지 모르겠다,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날 밤, 작은삼촌은 할머니의 상금으로 자동차를 사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꾸면서도 작은삼촌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외우는 것 하나만은 자신이 있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할머니는 전국의 산 이름을 암기하곤 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매일 암기를 하면 치매에 걸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할머니는 웬만한 친척들의 전화번호는 모두 기억했고, 심지어 동네 중국집과 치킨집의 전화번호도 외우고 있었다. 그랬던 할머니지만 뜻대로 공부가 되지 않았다. 문제집을 펼치기만 하면 잠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한 페이지도 못 넘기고 낮잠을 자는 할머니를 보더니 외할머니는 텔레비전을 껐다. “사돈, 안 되겠어요. 나랑 공부해요.” 외할머니가 문제를 내고 할머니가 문제를 맞히는 게임을 했다. 할머니가 문제를 틀리면 외할머니가 땡, 하고 말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틀린 문제를 노트에 적었다. 두 할머니는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통에 시달렸다. 두 눈이 아프고 멀미처럼 속이 미식거리는 증상도 똑같았다. 내과에 갔더니 의사가 과민성 소화불량이라고 말을 했다. “속이 미식거리지만 소화는 잘 돼요.” 외할머니가 말했다. 외할머니는 소화불량이라는 단어가 싫었다. 공부도 많이 하신 분들이 왜 그런 말밖에 생각을 못 했을까? 외할머니는 약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분명 소화불량이라는 단어 말고 더 그럴듯한 단어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고, 아버지는 내시경이라도 받아봐야 하지 않겠냐며 걱정을 했다. “이참에 종합검진을 받아보세요.” 아버지는 말했다.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한 번도 종합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뒤늦게 자신들이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깨달았다. 그걸 깨닫자 부모님의 눈에 할머니의 이마에 팬 주름이 보였고 외할머니의 어금니가 하나 없다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봉투 하나를 주었다. “가장 좋은 병원을 예약해요.” 봉투에는 가게 수입금을 속여 모아둔 돈이 들어 있었다.
종합검진 결과, 외할머니는 골다공증이 있는 것 말고는 나머지는 양호하다는 진단이 나왔고 할머니는 대장에 용종이 있으니까 앞으로 고기를 좀 줄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세 달째 김치찌개만 먹었는데 무슨 고기?”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투덜댔다. 심지어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몇 점도 넣지 못했다고. 옆에서 외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깁스를 하고 있는데도 사골 한번 안 끓여줬는데, 뭘.” 아버지는 봉투를 들여다보았다. 병원비를 내고 나니 몇 만원도 남지 않았다. 아픈 데도 없는데 괜히 종합검진을 했나, 하고 아버지는 생각했다. 그냥 내시경만 할걸. 아버지는 남은 돈으로 종합비타민을 두 통 샀다. “매일 한 알씩 드세요. 그리고 오래 사세요.” 할머니들은 아침식사를 하시고 비타민을 한 알씩 드셨다. 할머니는 학교에 가기 전에 내 입에 비타민을 한 알 넣어주었고, 외할머니는 가게로 출근하는 어머니의 손에 비타민을 한 알 쥐여주었다.
비타민을 먹어도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천만원의 상금을 타간 도전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안 쓰던 머리를 써서 두통이 온 거 아닐까요?” 외할머니가 거실에 쌓여 있는 상식문제집들을 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두통은 오랜만에 공부를 해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들은 도수가 맞지 않는 돋보기를 쓰고 있었고, 책을 읽거나 노트에 무엇인가를 쓸 때마다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두통은 그래서 생긴 것이었다. 고모가 월급을 타서 할머니들에게 돋보기를 새로 맞춰드렸다. 새 돋보기를 쓴 할머니는 고모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니 얼굴에 왜 이렇게 주근깨가 많니?” 외할머니는 하루 종일 할머니에게 문제집을 읽어주어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두 할머니는 소파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앉아서, 열여섯 여자아이들처럼, 까르르 웃어가며 공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