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거실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리모컨을 배 위에 올려놓고 다친 다리를 팔걸이에 올려놓으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외할머니의 가게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국가대표 축구시합이나 한국시리즈 같은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손님 중 몇몇은 텔레비전을 틀어달라고 말을 했다. “텔레비전이 없어.” 외할머니가 말을 하면 대부분의 손님들은 돈 벌어 텔레비전 좀 사세요, 하고 농담을 했지만, 몇몇 손님들은 화를 내며 나가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손님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싫었다. 술을 마시러 왔으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로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외할머니에게 족발 삶는 법을 가르쳐주던 사장은 늘 그렇게 말했다. 텔레비전을 틀어놓으면, 서로의 이야기를 하다가도, 드라마에 나오는 연예인이나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 들의 험담으로 이야기가 옮겨가곤 했다. 외할머니는 그런 이야기 끝에 싸움이 난다고 생각했다. 딸이 집을 나가겠다고 소리를 질렀다거나, 부인이 쌍꺼풀 수술에 실패를 했다거나, 아들이 난 커서 아빠 같은 사람은 안 될 거라는 말을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는 절대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여배우가 두 번 이혼을 했는지 세 번 이혼을 했는지를 놓고 멱살잡이를 하는 경우는 흔했다. 외할머니는 채널이 칠십 개가 넘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칠십여 개의 채널을 다 돌려가며 무엇을 볼지 결정하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십여 년 전에 상영했던 드라마가 다시 나왔고, 외할머니는 2회부터 마지막회까지 빠짐없이 보았다. 그러고는 처음 1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했다.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할머니가 물으면, 외할머니는 저 배우요, 암으로 죽지 않았어요? 하고 말을 했다. 외할머니는 암으로 죽은 배우를 가리키며 오 년 후에 자신이 아플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저렇게 철없이 웃는 것이 슬프다고 했다.
할머니는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퀴즈 프로그램을 좋아했는데, 도전자가 마지막 관문에서 성공을 하면 가족도 아니면서 같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외할머니는 손바닥을 맞대고 기도하는 자세로 퀴즈 프로그램을 보는 할머니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제발.” 할머니는 도전자가 문제를 맞힐 때마다 박수를 쳤다. 상금은 칠백만원에서 천사백만원으로 올라갔다. “저 돈 진짜 줄까요?” 외할머니가 물었다. “당연하죠.” 할머니가 대답했다. 외할머니는 기껏 정답을 맞힌다고 그렇게 많은 돈을 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걸 족발로 환산해보면 팔백 그릇은 족히 넘었다. 도전자가 다음 문제도 맞추었다. 할머니가 다시 한번 박수를 쳤다. “사돈. 이게 훨씬 드라마 같지 않아요? 저 사람은 상금을 타면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하네요.” 할머니가 퀴즈 프로그램에 빠지게 된 것은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매주 금요일마다 지난 일주일 치 신문과 세 권의 주간지를 읽고 늦게 퇴근을 했다. 그리고 주간지에 나오는 퀴즈에 빠짐없이 응모를 했다. 그렇게 많이 퀴즈에 응모를 했지만 당첨이 된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상품이 배달된 날은 할머니의 생일날이었고, 상품은 할머니가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커피잔이었다. 잔이 생기자 쓰다고만 생각했던 커피가 구수하게 느껴졌다. 그후로 잔은 손잡이가 세 번이나 떨어졌고, 그때마다 할머니는 순간접착제로 손잡이를 붙였다. “이제 좀 버려.” 할아버지가 새로운 잔으로 사주겠다고 하면 할머니는 그때마다 입을 삐죽이고는 똑같은 걸로 구해주면, 하고 대답했다. 마침내, 도전자가 마지막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마지막 상금은 오천만원이었다. “오천만원을 타간 사람은 많지 않아요. 지난 두 달 동안엔 한 명도 없었죠.” 도전자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외할머니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백과사전을 읽었다 했지. 외할머니는 중얼거렸다. “사돈, 저 프로에 나가봐요.” 할머니가 뒤를 돌아 외할머니를 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버저가 울리고, 사회자가 안타깝네요,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도전자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외할머니는 할머니에게 백과사전을 다 읽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겠느냐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한번 도전을 해보자고 말을 했다. “솔직히 돈도 필요하잖아요.” 할머니는 외할머니가 어떻게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궁금했지만 자존심이 상해 묻지 않았다. “심심한데, 그럼 어디 나가볼까요?” 할머니는 기지개를 켜는 시늉을 했다. 생각해보니 언젠가 열 문제를 모두 맞힌 적도 있었다. 그래 못 할 것도 없지. 할머니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