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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잠을 자다 몸을 뒤척일 때면,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라고 착각을 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여보, 아직도 자? 하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척 계속 잠을 자야 할지 몰라서 할머니가 눈치를 챌 때까지 몸을 뒤척였다. 할머니가 잠을 푹 자는 동안, 외할머니는 여러 번 잠에서 깼다. 할머니가 한평생 혼자 방을 써본 적이 없는 것과 달리, 외할머니는 지난 삼십여 년을 늘 혼자서만 잠을 잤다. 그래서 잠결에 옆에 누군가가 자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면 깜짝 놀라 일어나곤 했다. 누군가 옆에 있는 것이 거추장스럽기만 했고, 그제야, 외할머니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외롭게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낮에는 할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아버지만이 집에 있었다. 점심은 늘 아버지 담당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전을 부쳤고, 날이 좋은 날은 국수를 비볐다.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음식 냄새를 맡으면서 잔소리를 했다. “기름을 적당히 두르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야 해.” “국에 간이 너무 들어간 거 아닌가. 냄새가, 좀, 짠 듯해.” “국수 넘친다. 찬물 부어라.” 아버지는 냄새만 맡고도 부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맞힌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에 잔소리를 듣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버지는 다양한 부침개를 만들었고 냉장고에 늘 막걸리를 채워두었다.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술을 한잔씩 마시면 아버지는 부침개에 고추장아찌를 얹어서 할머니들의 입에 넣어드렸다. “돈 안 버는 것 말고는 나무랄 데가 없는 아들이에요.” 할머니가 외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임신을 했을 때 기뻐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고, 그래서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맞선을 보던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가스를 먹어보았다. 경양식집은 테이블마다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긴장하지 않도록 그 커튼의 반을 열어두었다. “사돈, 그 모습이 얼마나 괜찮아 보였는지 몰라요.” 할머니는 막걸리를 외할머니의 잔에 따라주면서 말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돈가스를 잘라주었다. 할머니가 허겁지겁 돈가스를 먹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할아버지가 반도 먹지 않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를 보고 있었다. 더 먹을래요? 하고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그릇에 고기 몇 점을 옮겼다. 갑자기 할머니는 창피해졌다. 원래는 이렇게 많이 먹지 않아요, 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신발이 없어서 한쪽 발을 비닐로 감싼 거지가 커튼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어찌나 냄새가 심했는지, 입안에서 돌던 향긋한 돈가스 소스의 맛이 사라질 지경이었다. 할머니는 소리쳤다. “저리 가요!” 그러고 자신도 모르게 재수 없게, 하고는 중얼거렸다. 거지가 포크 하나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너는 얼마나 깨끗해서. 나중에 나 같은 애나 낳아라.” 거지가 소리쳤다. 경양식집의 손님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붉어진 할머니가 커튼을 닫았다. 아버지를 임신했을 때 할머니는 거지가 했던 그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턱 밑에 달린 혹이 생각날 때면, 할머니는 하늘을 보고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눈이 너무 작다고 말을 했지만 할머니의 귀에는 그런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 어때, 얼굴에 혹이 없는데, 하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낮술을 하면서 할머니는 외할머니에게 어째서 아이를 넷이나 낳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넷을 낳는 동안 단 한 번도 태몽을 꾸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고. 할머니가 백과사전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외할머니는 할머니의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르면서 존경스러워요, 하고 말을 했다. “우리 애를 임신했을 때, 전 술값을 내지 않으려는 손님들과 싸워야 했어요.” 할머니는 그래도 다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적어도 한 놈 정도는 판사나 교수가 됐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가게 수입을 속인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내가 장사를 해서 그런지 손님이 없어.”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돈을 건네면서 말했다. 외할머니는 그중 삼십 퍼센트를 떼어서 어머니에게 주면서 생각했다. 사위가 저렇게 놀고 있으니 내가 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