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삼 개월 과정의 문화센터에 두번째 등록을 하자, 어머니는 아침밥을 먹고 나면 외할머니의 가게로 가서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같이 여행을 다닐 때는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는데, 식탁에 앉아서 나 커피 한잔만, 하고 말하는 아버지가 어머니는 못 견디게 답답했다. 어머니는 부엌에 가는 게 싫어졌고, 물을 마시고 싶어도 방에 누워서 꾹 참았다. 아버지의 여행기는 여전히 하늘 어디선가에서 머물고 있었다. 실은, 아버지는 비행기가 착륙했다, 라는 문장을 쓰기가 두려웠다. 아버지는 여행지에서 왜 여행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수십 번도 더 묻고 수십 번도 더 대답했다. 하지만 정작 문장으로 옮기려니까, 어떤 질문도, 어떤 대답도, 쉽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무리 글을 써본 적이 없는 아버지라도 주인공이 걷기 시작하면 질문도 시작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한 채 계속 머뭇거렸다.
어머니는 카운터에 앉아서 삼십오 년도 넘은 금고를 보았다. 귀퉁이에 거의 다 지워진 스티커가 보였다. 돈을 전대에 보관하던 외할머니가 금고를 산 것은 강도가 들어 전대를 통째로 빼앗긴 뒤였다. 외할머니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혼자 앉아서 술을 마시던 남자가 갑자기 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돌아보지 마!” 강도는 외할머니의 등에 칼을 대고는 소리쳤다. 두꺼운 조끼를 입고 있던 외할머니는 그 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그거 장난감 칼인 거 다 알아요, 오늘 술값 안 받을 테니 얌전히 나가세요, 하고 말했다. 그 순간, 허리에 찬 전대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강도가 칼로 전대의 끈을 끊은 것이었다. “이래도.” 강도가 말했다. 외할머니가 전대를 주워 강도에게 주었다. 그날, 강도가 떠난 뒤, 외할머니는 금고를 파는 가게로 갔다. 외할머니는 작지만 단단한 금고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금고를 계산대 위에 붙여버렸다. 만약 강도가 금고를 들고 가려면 책상까지 같이 훔쳐가야 했다. 실제로, 어머니가 옆 가게로 밥 두 공기를 빌리러 갔을 때, 금고를 훔치려던 손님이 있었다. 금고가 계산대에 붙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손님은 금고가 무거운 것인지, 자신이 힘이 없는 것인지, 고민을 하다 외할머니에게 붙잡혔다. 금고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스티커는 분홍색 하이힐 한 짝이었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자신이 붙여놓은 스티커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머리에 왕관을 쓰고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드레스에 분홍색 하이힐을 신은 공주였는데, 다 지워지고 하이힐 한 짝만이 남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스티커를 손톱으로 벗겨냈다. “엄마, 단골손님들도 그대로 와요?” 외할머니가 대답했다. “죽은 사람은 안 오고 산 사람은 오지.”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가게의 달력 위치가 바뀐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했고, 그러자, 갑자기 슬퍼졌다. 수많은 여행지에서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지만, 늘 똑같은 곳에 달력이 걸려 있는 가게에서 홀로 늙어가는 어머니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나 이 가게에 취직을 할까?” 어머니의 말에 외할머니가 주방 바닥에 물을 뿌리면서 얼른 집에 가, 가서 밥해라, 하고 말했다. “그딴 이야기 하려거든 다신 오지 말고.”
하지만, 다음날,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당분간 가게를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화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외할머니는 족발을 썰면서 중얼거렸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낳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딸의 손에서는 늘 로션 냄새만 나게 하리라 결심했다. 당신의 화장품은 제대로 산 적이 없었지만 베이비로션은 늘 최고급으로 샀었다. 마지막 손님이 모두 떠나고 가게 문을 닫던 외할머니는 가슴에서 덩어리가 울컥하며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밤공기를 쐬며 집까지 걷었다. 외할머니는 길을 걷다 빈 캔이 보이면 발로 걷어찼는데, 캔이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캔은 쓰레기봉투를 맞췄고, 어떤 캔은 대문을 맞췄고, 어떤 캔은 언덕 아랫길을 하염없이 내려가기도 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외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맥주 캔을 하나 발견했고, 그래서 발을 크게 휘둘러 있는 힘껏 캔을 걷어찼다. 그때였다. 무릎에서 툭, 하고 무엇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절룩이며 간신히 집에 도착한 외할머니는 파스를 세 개나 붙이고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외할머니는 혼자서 화장실도 갈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깁스를 하는 동안 외할머니는 이 모든 게 너 때문이야, 하고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했다. “니가 내 속을 뒤집어서 그런 거라고.” “나 때문이라면 속병이 나야지, 뼈에 왜 금이 가요?” 최소한 두 달은 일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외할머니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어머니에게 가게를 부탁했다. “그사이 단골이 떨어져 나가면 다 니 책임이야.” 외할머니가 말했다. 외할머니는 본인이 병원비를 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딸이 엄마 병원비도 못 내?” 어머니가 화를 냈다. 외할머니는 계산은 똑바로 하는 게 좋아, 하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가게 수입금도 정확히 계산하자. 칠대 삼이다. 칠은 물론 주인 몫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