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에게 감수성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들은 적이 있었다. 국어선생님은 모든 학생들에게 독서노트를 만들도록 했다. 한쪽 페이지에는 독후감을, 다른 페이지에는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을 옮겨적는 방식으로 독서노트를 만들었다. 국어선생님은 학생들의 노트를 검사하다가 멋진 구절들을 발견하면 그것을 자신의 수첩에 옮겨적었다. 그리고 지방에서 생물선생님으로 있는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마치 자신이 읽은 책인 양, 그 구절들을 인용하곤 했다. 아버지의 독서노트에는 인용할 구절들이 많았다. 국어선생님은 아버지의 노트의 마지막 장에 붉은 펜으로 ‘괜찮았어’라고 적곤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른 친구들의 노트에는 A, B, C 중 하나가 적혀 있었어요. 그런 칭찬을 받은 사람은 전교에서 나 하나라구요.”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직까지 아버지가 쓴 연애편지를 몇 통 가지고 있는데, 그다지 감수성이 뛰어난 문장이라고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어머니가 고등학생 시절에 펜팔을 했던, 부산에 산다는 남학생이,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편지를 잘 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어머니의 눈에는 어떤 편지도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큰삼촌의 방을 서재로 쓰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사온 노트북을 본 작은삼촌이 한글만 치면 될 걸 왜 이렇게 좋은 걸 샀어, 하고 물었다. “걱정 마. 이십사 개월 할부로 샀으니까. 그사이 책은 완성될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큰삼촌의 방은 이미 오래전에 내 방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럼, 제가 아직도 부모님과 같은 방을 쓰는 어린아이인 줄 아셨어요?” 그 말에 아버지는 비로소 내 키가 당신의 키와 거의 엇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식탁 한켠에 스탠드와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아버지는 깜빡이는 커서를 보다가 생각이 나지 않으면 싱크대로 가서 설거지를 했다. 쌓여 있는 그릇이 없는 날이면 냄비들을 뒤져 철수세미로 광을 내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나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노트북을 뒤져보았는데 거기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비행기가 출발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그 문장은 이렇게 바뀌었다. “배낭은 무거웠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그 문장은 지워지고 처음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두 달이 지나고 드디어 문장은 두 줄로 늘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용기를 내요, 라고 말하면서 꿀물을 타주었다. 마침내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을 해야겠다고 선언을 했다. 아버지가 식구들에게 팸플릿을 보여주었다. ‘소설의 읽기와 쓰기’라는 강좌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아버지의 노트북을 몰래 열어보았는데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화면이 떴다. 어머니는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서 어머니는 노트북의 뚜껑을 세게 닫으면서 중얼거렸다. 겨우 두 문장밖에 못 쓴 주제에.
아버지가 등록한 강좌에는 모두 열다섯 명의 수강생이 있었다. 그중 남자는 아버지 혼자였다. 강사가 자기 소개를 하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겨우 이름만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강사가 그만이요, 하고 말할 때까지 수강생들이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아버지는 식구들한테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모른다고 자랑을 했다. “이래봬도 내 얼굴이 아직 쓸 만하지.” 아버지는 두 볼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저녁엔 마사지라도 해야겠어.” 아버지가 수강생들에게 환호를 받은 이유는, 아버지의 예상대로, 얼굴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화요일 낮 두시에 백화점에서 글쓰기 강좌를 들을 만한 남자라면 사장 정도는 될 것이라고, 사람들이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중소기업 사장 정도는 못 되어도 웬만한 식당 한두 개 정도는 경영하지 않겠느냐고, 몇 년째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의를 듣던 수강생들은 생각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늘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수업을 들으러 갔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할머니는 새벽에 화장실을 갈 때면 식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곧 여행기를 써서 책으로 출간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때, 아버지는 부모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남자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 글을 강의 마지막 수업에 꼭 발표하리라, 다짐을 하면서. 아버지는 어릴 적 아이스박스에 갇혀 죽을 뻔한 이야기를 금이 숨겨진 대형 금고에 갇혀 죽을 뻔한 이야기로 살짝 바꾸어서 썼다. 아버지의 여행기는 ‘비행기가 이륙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라는 문장에서 멈춘 지 오래였다. 어떤 날은 그 파일을 열어 이렇게 문장을 고치기도 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팔짱을 끼고, 문장을 노려보다가, 다시 ‘비행기가 이륙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라고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