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남긴 유품은 얼마 없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옷가지들을 챙기다가, 팔 년 전에 겨울 점퍼를 사준 것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도 육십 퍼센트 할인을 하는 이월상품을 산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그것도 모른 채 옷에 붙은 가격표를 보고 놀랐고, 할머니는 큰맘먹고 산 거예요, 하고는 큰소리를 쳤다. 할머니는 상자에 할아버지의 빛바랜 티셔츠들을 집어넣었다. 돋보기 두 개와 허리띠 한 개도 상자에 담았다. 허리띠는 캥거루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부모님이 결혼을 한 그해에 할아버지에게 생일선물로 드린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허리띠는 구멍이 세 개가 늘어나 있었다. 처음 허리띠를 선물받았을 때는 끝에서 세번째 구멍에 버클을 고정했다. 내가 태어나고,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입맛에 맞게 알맞게 진 밥을 내기 시작하면서, 할아버지의 허리는 급격하게 불었다. 두번째 구멍으로 허리띠를 조정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살 좀 빼요, 하고는 말했다. 하지만 막상 이유 없이 살이 빠지기 시작해서 가장 안쪽 구멍까지 허리띠를 죄었을 때 할머니는 밥공기에 밥을 수북이 담으면서 살 좀 쪄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도장을 유품으로 물려받았다. “무슨 뼈라던데. 암튼 최고급이야.” 할머니는 말했다. 몇 달 후, 아버지는 도장가게에 가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당신의 이름을 새겼다. 도장을 파는 남자는 제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도장을 선물해주곤 했어요, 하고 말했다. 중학교 입학식 날 상아로 만든 도장을 선물하면서 사람은 모름지기 도장을 잘 찍어야 한단다, 하고 남자의 부모님은 말해주었다. 남자는 도장을 새기러 오는 사람들에게 늘 그 말을 했다. “도장을 잘 찍으셔야 합니다.” 남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새긴 뒤 천천히 인주를 묻혔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맨 마지막 장을 펼쳐 거기에 아버지의 도장을 찍었다. 그 노트는 남자가 도장가게를 처음 시작하던 날 샀던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그 동안 자신이 팠던 이름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찍혀 있었다. 아버지는 노트에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이름이 몇 개나 있을지 궁금했다. “자, 잘 되었습니다. 여기 보세요.” 남자가 노트에 찍힌 아버지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그 이름 뒤편 어딘가에 할아버지의 이름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 때나, 텔레비전 유선방송에 가입을 할 때나, 늘 도장을 사용했다. 서명하셔도 됩니다, 라고 직원이 말을 하면, 아버지는 도장을 꾹 누르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도장만큼 믿을 수 있나요.”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의 시계를 물려받았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구나.” 할머니는 말했다.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고모는 할아버지의 옷가지를 담은 상자를 뒤져 손수건 두 장을 찾아냈다. 고모가 어렸을 때, 용돈을 모아 어버이날 선물했던 것인데, 고모 자신조차도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멈아, 미안하다, 너한텐 줄 게 이것밖에 없다.”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할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마늘차를 꺼내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즐겨 먹던 것이었다. 마늘을 빻고, 흑설탕에 재우고, 일 년을 숙성시키는 일을 할아버지는 늘 손수 했다. 주무시기 전에 두 숟가락씩 뜨거운 물에 타 드셨는데, 그것이 일 년 내내 감기에 걸리지 않는 비결이라고 할아버지는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감기에 걸려 출근을 하지 못하던 어느 날,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침 방송에서 보았다. 원래는 꿀을 넣는 것이었는데, 꿀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대신 흑설탕을 넣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만든 마늘차를, 삼분의 이쯤 남은 마늘차를, 식구 수대로 탔다.
할머니는 마늘차를 마시는 식구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남긴 통장을 보여주었다. 통장은 모두 일곱 개였다. 아버지와 작은삼촌의 눈이 동그래졌다. 출퇴근을 하는 데만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작은삼촌은 이참에 회사를 그만두든지, 아니면, 회사 앞에 오피스텔을 얻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대는 하지 말고.” 할머니가 아버지 앞으로 통장을 밀었다. 통장에는 잔고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집을 살 때 진 빚을 갚는 데만 이십오 년이 걸렸다.” 할머니는 말했다. 아버지가 여덟 개의 통장의 잔고를 모두 합해보았다. 이백사십만팔천원이 전부였다. 작은삼촌과 고모가 생활비로 내놓는 돈으로 생활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그래서 그사이 결혼자금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야금야금 찾아 썼다는 것을, 할머니는 고백했다. “이게 다 니들이 아직까지 결혼을 안 했기 때문이야.” 할머니는 말했다. 작은삼촌은 주말이면 밀린 잠을 자두어야 했기 때문에 연애를 할 시간이 없었다. 고모의 주변에는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한결같은 말을 했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고. 하지만 몇 번의 연애를 실패한 후, 고모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괜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아버지는 통장 여덟 개를 쌓으면서 말했다. “이제 제가 돌아왔잖아요.” 할머니가 취직을 할 거니, 하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여행기를 책으로 쓸 것이라고 이미 제목도 정해두었다고, 식구들에게 말했다. “그러니 일 년만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