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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호텔에서 지독한 감기를 앓는 동안, 아버지는 늘 똑같은 꿈을 꾸었다. 할아버지가 어린 아버지를 목말을 태워 어디론가 걸어가는 꿈이었다. 사막이었고, 어린 아버지의 키를 넘는 선인장들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목말라요.” 아버지는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단다, 하고 대답했다. “목말라요.” “조금만 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오직 그 말만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잠을 깨보면 아버지의 입술은 갈라져 피가 나고 있었다. “집에 전화를 해야겠어.” 아버지는 말했다. 어머니가 젖은 수건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전화는 쉽게 연결이 되지 않았다. 호텔 지배인은 웃는 얼굴로 걱정 마세요, 언젠가는 됩니다, 하고 말했다. 마침내, 열 번도 넘게 시도를 한 끝에, 전화벨이 울렸다. 얼른 돌아오라는 고모의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모든 짐들을 호텔에 버렸다. 아버지가 배낭을 멜 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수소문을 해서 엄청난 웃돈을 얹어주고 트럭 한 대를 빌렸다. 운전기사는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딸을 둔 사람이었는데, 가족 중에 누군가 아프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눈물을 흘릴 만큼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사는 엄청난 속도로 길을 달렸다. 꼬박 하루 만인 이십사 시간 만에 도시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수도로 이동을 하는 데 여덟 시간. 그 나라의 유일한 국제공항에 도착을 해보니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일주일에 두 번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동남아의 어느 도시를 두 군데나 경유한 끝에 마침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부모님을 기다리는 바람에, 할아버지의 발인은 하루가 늦어졌고, 그래서 사일장을 치르게 되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다음날, 할머니는 모처럼 밥솥 가득 밥을 했다. 먼저 할아버지의 밥그릇에 밥을 담고 그다음에는 큰삼촌의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할머니는 식구들을 깨웠다. 식탁은 어머니가 혼수로 해온 것이었다. 외할머니의 단골손님 중에는 가구점 사장이 있었는데, 외할머니는 그 사람에게 딸이 식구가 많은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목수는 가구 하나는 내가 선물하겠소, 하고 말했다. 빈말인 줄 알았던 외할머니는 일주일 뒤에 배달된 식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외할머니는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비싼 걸 받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얼마인지 알려줘요.” 외할머니에게 마음이 있었던 사장은 삼백만원이에요, 하고는 웃었다. 무엇이든지 족발 가격으로 계산하는 버릇이 있던 외할머니는 순간 족발이 이백 그릇이네, 하고 중얼거렸다. “대신 일 년 내내 공짜 술을 주면 되잖아요.” 사장이 말했다. 외할머니는 일 년이 아니라 평생 공짜 술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느 겨울날, 술에 취한 사장이 외할머니의 손을 잡았을 때, 비로소 외할머니는 평생 공짜 술을 주겠다는 약속을 후회했다. 식탁을 본 어머니는 결혼을 한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사장은 10인용 식탁을 선물했고, 어머니는 그렇게 커다란 식탁에 사람들이 앉아서 밥을 먹는 장면이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어보았다. 외할머니는 이쪽 끝에 앉고 어머니는 저쪽 끝에 앉아서. 반찬에 손이 닿지 않아서 반찬을 먹을 때마다 매번 엉덩이를 들어야 했다. 외할머니는 말했다. “의자 열 개도 모자란 날이 올 거야. 니 뱃속에 있는 녀석만 해도 벌써 아홉이잖니.” 그때 어머니는 대답했다. “엄마가 놀러 오면 되잖아. 그러면 의자가 딱 맞아.” 하지만 10인용 식탁에 열 사람이 앉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식구들은 할아버지의 밥그릇과 큰삼촌의 밥그릇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여느 아침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오늘 국은 좀 짜네.” 하지만 할머니는 모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밥공기가 놓여 있는 자리에는 의자가 없다는 것을. 열 개의 의자 중 하나는 예전부터 밥솥을 올려놓았고, 다른 하나는 고모가 이층으로 가져가 화장대 의자로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할아버지의 자리에 의자가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식구들은 말없이 젓가락질만 했다. 나는 할머니 몰래 내 옆 의자 위에 쌓여 있는 신문들을 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의자는 큰삼촌의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