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마당에 서서 훌라후프를 하는 꿈을 꾸었다. 증조할아버지가 호스로 만들어준 훌라후프였는데, 호스에 모래를 넣어서 돌릴 때마다 쉭, 쉭, 하는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는 열 바퀴를 넘기지 못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천 번을 돌리면 새 운동화를 사주마, 하고 말했다. 훌라후프가 한 바퀴 돌 때마다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운동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송충이가 기어가는 것을 한없이 보던 어느 여름날이 떠올랐다. 송충이의 털 위로 이마에 맺힌 땀 한 방울이 떨어지는 장면이 아주 느린 화면으로 지나갔다. 어찌나 느린지, 누군가 리모컨으로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송충이가 할아버지 그림자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해가 한가운데 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비행기가 해를 반으로 가르면서 지나갔다. ‘다시 태어나면 파일럿이 될 거야.’ 할아버지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라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훌라후프가 무릎 아래로 미끄러졌다. 증조할아버지가 박수를 쳤다. “이번엔 스무 바퀴나 돌렸구나.” 할아버지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훌라후프를 돌렸다. 깍두기 국물에 귀퉁이가 젖은 국어교과서가 보였다. 할아버지는 교과서 앞장에 적은 이름을 지웠다. 그리고 옆 교실로 가서 책상 서랍에 들어 있는 누군가의 국어교과서와 자신의 것을 맞바꾸었다. 여학생의 차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여학생이 고맙습니다, 라고 말할 때 눈밑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할아버지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할아버지는 그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그 여학생이 다니는 학교의 정문 앞에서 할아버지는 난 키 작은 남자는 싫어요,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 여학생은 할아버지의 손에 빌린 차비를 쥐여주었다. 할아버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어서 일어나세요, 라고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할아버지는 귀가 간지러웠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더욱더 세차게 훌라후프를 돌렸다. 나중에 아들이 생기면 같이 훌라후프를 해야지, 생각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백 살이 넘은 노인들이 서른 명도 넘게 산다는 마을을 찾아갔다. 마을 입구에는 세계 최고의 장수마을이라는 안내판이 적혀 있었다. 관광객 다섯 명을 태운 미니버스는 산길을 스물여덟 시간이나 달렸고, 그사이 두 번이나 산사태를 만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다. 부모님은 스물여덟 시간 내내 바나나만 먹었다. 백 살이 넘은 노인들은 하나같이 이가 없었다. 어떤 노인은 어금니 두 개가 남은 이의 전부이기도 했다. 노인들은 나무그늘에 앉아서, 막걸리 비슷한 술을 마시면서, 노닥거렸다. 그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아버지는 우리도 집에 돌아가거든 마당에 둑을 묻고 술을 담가요, 하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노인들이 평상에 누워서 낮잠을 자는 장면을 찍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아버지는 무엇인가 겨드랑이를 뚫고 등뒤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오한이 느껴졌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감기에 걸릴 것 같아, 하고 말했다.
아버지가 저녁 아홉시면 불이 꺼지는 호텔에 누워 감기를 앓고 있었을 때, 할아버지는 여전히 훌라후프를 돌리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이제 할아버지의 훌라후프는 점점 커졌다. “이리 들어와.” 할아버지가 손짓을 하자 훌라후프 안으로 어린 아버지가 뛰어들어갔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을 안은 채 같이 훌라후프를 돌렸다. “나도, 나도!” 셋째아들과 막내딸이 손을 흔들었다. “둘째는 어디 있니?” 할아버지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셋째아들과 막내딸이 훌라후프 안으로 들어왔다. 막내딸의 뒤꿈치에 걸려 훌라후프가 잠시 휘청했다. 할아버지가 세 아이들을 안자 팔뚝의 근육이 불거졌다. 여전히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증조할아버지가 구백! 하고 소리쳤다. “이제 백 번만 더 하면 된단다.” “네, 아빠.”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할아버지는 한 번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 라고 말을 하는 순간 훌라후프가 다시 작아졌다. 할아버지의 키도 작아졌다. 다시 송충이가 기어가는 것을 보던 어느 여름날이 떠올랐다. 그 송충이를 발로 짓밟으면서 할아버지는 침을 한 번 뱉었다. 그때였다. 증조할아버지가 박수를 쳤다. “잘했다, 천 번. 자, 운동화 사러 가야지.” 할아버지는 저 멀리서 증조할아버지가 손을 내미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그 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나도 안 늙으셨어요.” 할아버지가 말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손이 살짝 들리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면서 집에 가요, 하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심장이 멈추기 전에, 집에 가요, 하는 소리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기억에 의하면 그것은 처녀 시절의 할머니 목소리와 똑같았다. 할머니는 모르겠지만, 이제, 할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집에 가요, 였다. 그 말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연애를 할 때, 할머니가 술 취한 할아버지에게 자주 하던 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