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를 찾아 아파트로 가던 도중, 할아버지는 고물을 줍고 있는 사내를 만났다. 사내는 허리를 굽히고, 언덕길을 힘들게 올라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뒤에서 리어카를 밀었다. 언덕길을 다 오른 후에 사내가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뒷산 입구에서 막걸리와 파전을 파는 작은 가게를 했던 사내였다. 할아버지는 가끔 그 집에 들러 안주 없이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곤 했다. 막걸리를 두 사발 마시는 날에는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봐요, 하고 사내가 묻곤 했다. 그러고는 서비스라며 계란이 들어간 장조림을 내주었다. 할아버지는 사내에게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그사이, 사내의 허리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굽었고 이마의 주름은 깊어졌다. 사내와 헤어져 길을 걷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금방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 것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집안 내력이었다. 할아버지는 아파트 상가로 뛰어들어갔다. 1층에 있는 남자화장실은 잠겨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문고리를 거꾸로 비틀어야 열렸다. 그것을 알려준 이는 박씨였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할아버지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할아버지는 조금 전에 만난 사내가 왜 알은체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들르던 단골이었는데. 혹시 내가 너무 늙어 보여 모른 척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할아버지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자식이란 것들이 보약 한 채도 안 지어주고.” 할아버지는 화장실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게다가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팬티를 벗어 일을 해결하려다가, 할머니가 바람 펴? 하고 물었던 게 생각나서 참았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백을 세었다. 그 동안 아무도 안 들어오면 양말이라도 벗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양말은 할아버지의 생일날 내가 선물한 것이었다. 백을 다 세었는데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양말을 벗으면서 할아버지는 생일은 매년 찾아오니까, 하고 생각했다. 양말 한 짝을 휴지통에 버리려는 순간,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을 세지 말고 천을 셀걸. 할아버지는 투덜대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세면대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물을 안 내렸네.” 할아버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시 몸을 돌려, 변기의 물을 내리려는 순간, 할아버지는 남자의 옆에 여자아이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 아이가 할아버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남자가 여자아이의 치마 속에서 손을 빼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할아버지는 화장실 쓰레기통을 집어 남자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남자가 쓰레기통을 피했다. 휴지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남자가 할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몰아붙였다. 숨이 턱 막혔다. 할아버지도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할아버지는 팔 힘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지만, 남자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할아버지는 남자를 잡아당겨 머리로 박치기를 했다. 남자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남자가 에이씨, 하고 도망을 갔다. “얘야 괜찮니?” 할아버지가 세면대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가 할아버지의 이마를 만졌다. “피가 나요.” 할아버지가 괜찮다고, 피라는 건 원래 멈추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가자,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할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다시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남자가 할아버지의 뒤통수를 각목으로 내려쳤다. 바닥에 쓰러진 할아버지는 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다시 남자가 데려가지 못하도록. 아이는 방금 전에 할아버지가 한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아이가 화장실이 울리도록 새된 소리로 악을 쓰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으면서도 할아버지는 그놈 참 목청 크네, 하고 생각했다. “우리 손자 녀석도 목청이 크단다.” 할아버지는 분명 그렇게 말했지만, 아이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상가 2층에서 파마를 하던 여자였다. 여자는 파마를 말던 미용실 원장에게 무슨 소리 안 들려? 하고 물었다. 젊었을 적에 뚱뚱했던 여자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여자는 늘 귀를 쫑긋하며 걸었다. 저 여자 좀 봐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여자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침을 뱉곤 했다. 더 심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쫓아가 심한 욕을 퍼붓기도 했다. 미용실 원장이 무슨 소리요? 하고 되물었다. 여자는 그후로 삼십 킬로그램이나 감량을 했지만, 청각만은 여전해서 멀리서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틀림없어. 비명소리네.” 미용실 원장과 여자는 파마를 말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층 화장실에서 여자아이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을 때, 두 여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왜 할아버지는 양말을 한 짝만 신고 있지?” 미용실 원장이 아이에게 물었지만, 여자아이는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미끄러졌나?” 여자가 추측을 해보았지만 화장실 바닥에는 물기가 하나도 없었다.
상가에 도착을 한 구급대원들은 더더욱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구급대원의 눈에는 양말을 한 짝만 신은 할아버지보다도 파마를 반쪽만 말고 있는 여자가 더 이상했다. 구급대원이 억지로 아이를 잡고 있는 할아버지의 손가락을 폈다. 아이의 손목이 파랗게 멍이 들었다. “죽었어요?” 아이가 물었다. 다른 구급대원들이 응급처지를 한 뒤 할아버지를 들것에 옮겼다. “아니야. 아직 숨을 쉬잖니.” 아이가 손을 뻗어 할아버지의 코 밑에 손을 대보았다. 희미하게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따뜻한 물 한 잔 줄까?” 구급대원이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급대원이 담요로 아이를 감싸자 그제야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