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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아졌다.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아침잠이 많아진 것은 뒷산이 아파트 단지로 바뀐 뒤부터였다. 뒷산에는 약수터가 두 군데가 있어서, 짝수 날은 오른쪽 약수터, 홀수 날은 왼쪽 약수터, 이렇게 번갈아 가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는 아침밥을 먹기 전에 할아버지가 떠온 약수를 한 잔씩 마셨다. “그게 니들이 감기 한번 안 걸린 비결이다.” 할아버지는 늘 말했다. 할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날은 하루에 두세 번씩 올라갈 정도로 할아버지는 뒷산을 좋아했다. 뒷산이 없어지자, 마땅히 갈 곳이 없어졌고, 할아버지는 새벽마다 마당을 몇 바퀴 서성였다. 그러다 이내 마당이 너무나 좁게 느껴졌고 그 집에서 평생을 살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새벽에 눈이 떠져도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다. 열세 살 무렵에 증조할머니에게 반항을 하다 종아리를 맞았던 기억이라든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음을 먹었을 때의 기억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회초리가 종아리에 닿았을 때의 날카로운 통증, 얼음을 깨물었을 때의 차가운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할아버지는 놀라웠다. 천장을 보며 밍기적거리는 일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는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이불속에서 나오질 않았다.
부모님이 오랫동안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자, 할아버지는 뒷산을 허물고 지은 아파트 단지로 갔다. 박카스 한 박스를 사들고 경비실에 찾아간 할아버지는 경비생활만 십 년이 넘는다는 박씨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씨에게는 반신불수가 된 아내가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할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내 마누라도 치매요, 하고 거짓말을 했다. 박씨를 만나고 돌아온 날, 저녁밥을 먹으면서 할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새로 취직을 하겠다고 말했다. “어디에요?” “우리 같은 노인을 누가 써준대?” “이제 그만 쉬세요.”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있는 아파트 있잖니. 거기 경비가 한 명 그만두었다는구나.” 할아버지는 박씨에게 손 좀 잘 써달라고 돈 십만원을 찔러준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거기 아는 사람이 있단다. 그 사람이 힘써준다고 그랬다.” 할아버지는 남은 국에 밥을 막아 후루룩 마셨다.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경비가 되어 아파트를 순찰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고장난 차가 있다면 주인에게 어디가 어떻게 고장났는지 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바가지를 쓰지 않도록. 택시회사에서 경리과장으로 일을 했지만, 삼십 년 세월 동안 어깨너머로 본 것들이 있어서, 웬만한 고장은 알아맞힐 수 있었다. 또 일주일이 지났다. 할아버지는 그사이 박카스를 한 박스 들고 다시 경비실에 찾아갔지만 그날은 박씨가 쉬는 날이었다. 몇 번의 전화 끝에 박씨와 연결된 할아버지는 이미 새로운 사람을 뽑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안해요.” 박씨가 말했다. 전화를 끊은 할아버지의 눈앞에 박카스 두 박스와 십만원이 아른거렸다. 할아버지는 열무김치에 밥을 두 그릇이나 비벼 먹었다. “웬 밥을 그리 먹어?” 할머니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빼앗아 먹으려 하자, 할아버지가 자신의 숟가락으로 할머니의 숟가락을 밀었다. “오늘은 밥 먹고 기운을 낼 일이 있어.” 밥을 다 먹은 할아버지는 이를 닦았다. 그러고는 거울을 보면서 십만원 내놔요, 하고 말을 해보았다. 마지막으로 가그린으로 입을 헹구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혹시 바람 펴? 하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씨에게 십만원을 돌려받으러 간다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아파트 상가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할아버지가 발견되었을 때, 할머니는 바람 펴? 하고 물었던 그 말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어쩌면 그것이 할아버지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