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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그만두는 날, 아버지는 커다란 배낭을 사왔다. 이 년 전에 샀던 것보다 훨씬 큰 배낭이었다. “나도 들어가겠어요.” “한번 들어가봐.” 내가 배낭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얼른 배낭 입구 끈을 조였다. “답답해요.” 나는 소리쳤다. 아버지는 니가 짐이라고 상상해봐, 하고 말했다. 나는 즐거운 일만 상상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왜 짐이 되는 상상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알았다고 대답했다. “우린 지금 어느 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쉬고 있어. 다섯 시간을 쉬지도 않고 걸은 후야.” 나는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불어오는지, 바람 끝에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를 상상해보았다. 그러자 혼자 앉아서 시소놀이를 하는, 지루하게 시간이 더디 가는 어느 오후가 생각났다. 혼자 시소를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다보면 맞은편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처럼 무게가 느껴졌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좀 살살해, 엉덩이 아프잖아,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잠시 후, 아버지가 배낭을 메는 것이 느껴졌다. “자 다시 길을 가볼까.” 아버지는 마루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밖으로 나갔다. “여기부터는 언덕길이네.” “우와, 천년은 더 산 것 같은 나무가 있어.” “곧 해가 지겠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아버지는 계속 말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얘야!”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배낭 옆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왜 말이 없어?” 그제야 나는 저는 짐이라면서요, 하고 대답을 했다. “인간도 아닌데 어떻게 말을 해요.” “그렇구나.” 아버지는 배낭끈을 한번 조절한 다음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등에 대고 이번에 가면 언제 올 거예요? 하고 속삭였다. “니가 크면 이런 배낭을 메고 같이 걸어가자. 셋이서. 나란히.”
할머니는 부모님이 다시 여행을 가겠다고 하자 절대 떠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니들 여권은 벌써 숨겨두었어. 못 찾을 거야.” 할머니는 요즘 들어 아버지가 마당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밥을 먹다 말고 한숨 쉬는 일이 잦아지더니, 결국 가출을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서 어머니의 화장대를 뒤져 여권 두 개를 찾아냈다. “어디에 숨겼는지는 내가 죽을 때 알려줄게.” 할머니가 말했다. 아버지는 텔레비전 옆에 배낭을 두었다. 모든 식구들이 볼 수 있도록. 식구들이 텔레비전을 볼 때나, 차를 마실 때나, 아니면 마루에서 낮잠을 잘 때나, 아버지는 그 옆에 앉아 배낭에 짐을 쌌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마침내 할아버지가 배낭을 발로 걷어차면서 한마디를 했다. “넌 장남이야.”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말없이 마루에 늘어놓은 짐들을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배낭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큰삼촌의 방에 배낭을 넣은 후 아버지는 네가 장남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페인트를 사다가 대문을 칠했다. 시멘트로 갈라진 틈을 메웠고, 낡은 모기장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떨어져나간 화장실 타일을 붙였고, 물줄기가 일정하지 않았던 샤워기도 고쳐놓았다. 식구들이 모두 말렸지만 도배까지 도전했다. 이틀이나 걸렸고, 몇 군데 도배지가 울긴 했지만 도배공이 한 것처럼 무늬까지 정확히 맞추었다. 도배가 끝나던 날 아버지는 작은삼촌에게 술 한잔하자, 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작은삼촌은 단골로 가는 포장마차의 위치를 아버지에게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포장마차로 갔다. 삼촌은 이미 어묵국물에 소주를 한잔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왜요?” “셋이 마시는 게 소원이라며.” 아버지는 내 잔에 사이다를 따라주었다. 나는 아버지와 작은삼촌의 잔이 빌 때면 재빨리 술을 채웠다. 몇 번의 건배를 한 후 아버지가 작은삼촌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작은삼촌이 물었다. “너 다 가지라고. 집 말이야.” 아버지는 한 푼도 물려받지 않겠다고, 그러니, 모두 작은삼촌이 가져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유산을 물려받지 않겠다는 서약서야. 거기 서명도 했어.” 삼촌이 술을 한잔 마시더니 낄낄거리며 웃었다. “뭐, 이러니 우리 집이 대단히 부자인 것 같네. 달랑 집 한 채인데 말이야.” 작은삼촌이 종이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좋아. 대신 제사는 형이 지내.” 나는 작은삼촌에게 나중에 삼촌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집을 물려줘도 아무 말 안 할게, 하고 말했다. 작은삼촌이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여기 맵지 않게 소시지볶음 해주세요, 하고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대신 조건이 있어.” 아버지가 골뱅이무침의 소면을 젓가락으로 돌돌 말았다. “취직을 해.” 작은삼촌이 고개를 숙이고 끝이 붉게 물든 나무젓가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