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다시 본 건 일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일요일이었고, 식구들은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일요일 식단은 언제나 똑같았다. 어머니는 일요일이면 밥솥 가득 밥을 했다. 국도 찌개도 끓이지 않았다. 냉장고에 있는 모든 반찬들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밥통의 취사버튼을 누르면, 일요일의 아침 준비는 끝이었다. 식구들은 일어나는 순서대로 알아서 밥을 먹었다. 어느 날, 늦잠을 자는 식구들 때문에 아침상을 다섯 번이나 차리는 것을 본 할머니가 제안을 한 것이었다. “각자 취향대로 비벼 먹도록. 그게 싫으면 알아서 해먹든가.” 콩나물 무침 같은 것들은 늦게 일어나면 다 떨어지고 없었다. “낮 두시에 일어났더니 남은 반찬이 김치밖에 없더라.” 작은삼촌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밥을 먹었다. 먹고 다시 잘 거야, 라고 말을 하며. 일찌감치 일어나 어묵볶음으로 밥을 먹은 나는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막을 뛰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나는 소파 반대편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달리기 대회를 하나보네.” “설마.” 나는 대답했다. 설마는 그즈음 즐겨보던 만화책의 주인공이 즐겨 쓰는 말이었다. 엄마가 공부해라, 하고 말하면 주인공은 텔레비전 리모컨을 누르면서 설마, 하고 대답한다. 동생이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나 변비인가봐, 하고 말해도 설마, 하고 대답한다. 가장 압권은 회사에서 잘린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4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 동생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깔깔거리며 주인공의 어깨를 치는 장면. 오직 웃지 않는 아버지만이 혼자 마른세수를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연다. “나 회사에서 짤렸어.” 그러면 주인공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설마.” 내가 만화책에서 그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장면 때문이었다. 다시 네 명의 가족이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세상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것은 방금 전 보여주었던 그 가족의 풍경이었다. 아이는 텔레비전 속의 주인공이 실직한 아버지에게 설마, 라고 말하는 장면을 웃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본다. 왜 웃지 않는 거지? 나는 그 장면이 이상했다. 배꼽을 잡고 웃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완성될 것만 같았다. 다른 만화책들처럼. 나는 사막을 달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걷기도 힘든 것을 뛰다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만화책 주인공이라면 설마, 라는 단어를 수십 번도 더 외칠 것이다. “한국인도 있네.” 할아버지가 말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스카프 같은 걸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다리를 절뚝이며 뛰고 있었다. 카메라는 그 여자를 한참 따라갔다. 여자가 뛰기를 멈추고 물을 꺼내 마셨다. “어, 그 여자다. 초콜릿!” 나는 외쳤다. 밥을 먹던 식구들이 부엌에서 달려나왔다.
물을 다 마신 여자는 다시 얼굴을 가리고 뛰기 시작했다. “어디?” “전혀 알아볼 수 없잖아.” “난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겠다.” 식구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분명히 봤어. 물을 마실 때. 그 여자 입술 끝에 점이 있잖아.” 일요일 오전에 사막을 달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은 꽤 괜찮은 일이었다. 먼지가 화면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이상하게 숨이 가빠왔다. 낮잠을 자면 멋진 꿈을 꾸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마라톤 중계를 즐겨 보는 어른이 될 것만 같았다. 일요일이면, 일주일치 와이셔츠를 빨고, 전화기를 꺼놓고, 소파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마라톤 생중계를 보게 될 것만 같았다. 여자의 뒤에는 덩치가 아주 큰 금발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취재용 지프차만이 보였다. “꼴찌는 하지 말았으면.” 고모가 말했다. “꼴찌면 어때.” 작은삼촌이 말했다. 카메라가 바위 그늘에 앉아서 쉬고 있는 선수들을 보여주었다. 한 선수가 두 손으로 X자 모양을 만들었다.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카메라가 그 선수의 발을 보여주었다. 피에 젖은 양발이 보였다. 곧이어 지프차가 지나갔고, 경기를 포기한 선수가 지프차에 탔다. 지프차 뒷자리에는 대여섯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포기한 건가요?” 그러자 선수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앳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여기까지 달린 것도 대단했어요, 하고 말했다. “너도 나가봐라.” 작은삼촌이 내 등을 밀었다. 해가 졌다. 여자는 아직도 달리고 있었다, 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여자는 걷고 있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파티를 하고 있었다. 바비큐를 굽고, 맥주를 마시고,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결승지점에 들어오면 박수를 쳐주었다. 이제 카메라는 마지막 남은 두 여자를 보여주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할머니가 말했다. 마침내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저 멀리 보인다. 여자가 마지막 남은 물을 마셨다. 그러고 신발 끈을 고쳐맸다. 여자는 저 멀리 결승지점을 향해 달렸다. 여자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리들은 박수를 쳤다. 여자가 두 손을 번쩍 든 순간,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여행중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왜 내가 이러고 있지? 아버지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학교 운동장에서 넘어졌던 어느 날이 생각났다. 무릎이 까졌고, 어머니는 받아쓰기 공책을 찢어 피가 나는 무릎에 붙였다. '해바라기'를 '헤바라기'로 틀리게 쓴 글자가 피에 젖었다. 고모는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면 새똥 때문에 화를 낸다 해도 다 받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작은삼촌은 과연 복수는 성공한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방송국에 전화를 해서 저 여자의 연락처를 알아내야지, 하고 작은삼촌은 생각했다.
물을 다 마신 여자는 다시 얼굴을 가리고 뛰기 시작했다. “어디?” “전혀 알아볼 수 없잖아.” “난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겠다.” 식구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분명히 봤어. 물을 마실 때. 그 여자 입술 끝에 점이 있잖아.” 일요일 오전에 사막을 달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은 꽤 괜찮은 일이었다. 먼지가 화면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이상하게 숨이 가빠왔다. 낮잠을 자면 멋진 꿈을 꾸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마라톤 중계를 즐겨 보는 어른이 될 것만 같았다. 일요일이면, 일주일치 와이셔츠를 빨고, 전화기를 꺼놓고, 소파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마라톤 생중계를 보게 될 것만 같았다. 여자의 뒤에는 덩치가 아주 큰 금발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취재용 지프차만이 보였다. “꼴찌는 하지 말았으면.” 고모가 말했다. “꼴찌면 어때.” 작은삼촌이 말했다. 카메라가 바위 그늘에 앉아서 쉬고 있는 선수들을 보여주었다. 한 선수가 두 손으로 X자 모양을 만들었다.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카메라가 그 선수의 발을 보여주었다. 피에 젖은 양발이 보였다. 곧이어 지프차가 지나갔고, 경기를 포기한 선수가 지프차에 탔다. 지프차 뒷자리에는 대여섯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포기한 건가요?” 그러자 선수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앳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여기까지 달린 것도 대단했어요, 하고 말했다. “너도 나가봐라.” 작은삼촌이 내 등을 밀었다. 해가 졌다. 여자는 아직도 달리고 있었다, 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여자는 걷고 있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파티를 하고 있었다. 바비큐를 굽고, 맥주를 마시고,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결승지점에 들어오면 박수를 쳐주었다. 이제 카메라는 마지막 남은 두 여자를 보여주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할머니가 말했다. 마침내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저 멀리 보인다. 여자가 마지막 남은 물을 마셨다. 그러고 신발 끈을 고쳐맸다. 여자는 저 멀리 결승지점을 향해 달렸다. 여자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리들은 박수를 쳤다. 여자가 두 손을 번쩍 든 순간,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여행중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왜 내가 이러고 있지? 아버지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학교 운동장에서 넘어졌던 어느 날이 생각났다. 무릎이 까졌고, 어머니는 받아쓰기 공책을 찢어 피가 나는 무릎에 붙였다. '해바라기'를 '헤바라기'로 틀리게 쓴 글자가 피에 젖었다. 고모는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면 새똥 때문에 화를 낸다 해도 다 받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작은삼촌은 과연 복수는 성공한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방송국에 전화를 해서 저 여자의 연락처를 알아내야지, 하고 작은삼촌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