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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는 누가, 왜, 그것을 새겨넣었는지 궁금했고, 그래서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그 이야기를 적어 보냈다. 그러자 사연을 들은 시청자가 전화를 해서 자기 집에도 똑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우리집에는 여러 곳에 있어요. 안방은 천장에 새겨져 있어서 이사한 지 십 년 만에 발견했을 정도예요.” 다른 시청자는 자기네 집에는 ‘ㅎㅇ’이 아니라 ‘ㅅㅇ’이 새겨져 있다고 했고, 또다른 시청자는 ‘ㅇㅇ’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이 모든 사연을 들은 후, 라디오 DJ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세 아들을 둔 목수가 있었다. 목수는 집을 수리할 때마다 자신의 이니셜을 새겨넣었다. 일종의 상표처럼. 아버지의 일터에서 나무쪼가리를 가지고 놀던 삼형제는 커서 전부 목수가 되었고, 일을 완성하면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자기 이름을 새겨넣었다. “이름의 끝이 전부 이응으로 시작하는 걸 보면 제 이야기가 맞지 않을까요? 어찌되었든 오늘은 이름에 이응이 들어가는 분들 행운 있으세요.”
이름에 이응이 들어 있지 않은 고모는 라디오 DJ가 해준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고모는 지하철 문이 닫힐 때 가방 끈이 문에 끼는 일을 당했다. 그후로 계속해서 반대쪽 문만 열렸고, 결국 고모는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내리지를 못했다. 내 이름에 이응이 없어서 그래. 고모는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가 뭐 하니? 하고 물었다. 영어선생님이었다. “니가 안 내리길래 나도 안 내렸다.” 영어선생님이 말했다. “너 가출하려는 거지?” 선생님이 다시 한번 물었다. 고모는 문에 낀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에요. 이것 때문에 못 내린 거예요.” 고모가 탄 지하철은 서해안의 어느 바닷가가 종점이었는데, 가출한 청소년들이 즐겨 가는 곳 중 하나였다. 영어선생님은 그 지하철에서 가출한 아이들을 족집게처럼 찾아냈다. 니가 안 내리길래 나도 안 내렸다, 는 말은 그런 뜻이었다. 하지만 고모는 선생님이 자기를 좋아해서 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러다 선생님의 이름이 ‘ㅎㅇ’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생각났고, 행운이 있으라는 라디오 DJ의 낭랑한 목소리가 떠올랐고, 꽤 오랫동안 영어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꽃다발을 보낸 적이 없는 남자는 고모가 계속해서 꽃 이야기를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모가 조잘거리는 게 그다지 싫지 않았고 그래서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고모를 소개시켜준 동창이 남자에게 될 수 있으면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충고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혀가 짧았고, 그래서, 많은 여자들에게 차였다. 고모는 곧 다가올 자신의 생일날 남자가 어떤 꽃을 보낼 것인지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고모의 생일날, 남자는 고모에게 곰인형이 달린 열쇠고리를 선물했다. 늘 식구 중 누군가는 집에 있었기 때문에 고모는 열쇠를 갖고 다닌 적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열쇠고리를 선물하다니. 고모는 남자가 무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남자의 무심한 행동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모는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말을 했다. 남자는 뭐가 문제냐고 물었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고모는 지난번 설렁탕 먹을 때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소금이랑 파를 넣었어요? 하고 말했다. “전 그런 사람 싫어해요. 제가 소금을 먹는지 안 먹는지 어떻게 알아요?” 헤어지자는 고모의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은 남자는, 역시 혀 짧은 소리가 싫은 거죠, 하고 말했다.
남자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고모는 식구들에게 말했다. “다신 이름에 ‘ㅎㅇ’이 들어가는 사람과는 사귀지 않겠어.” 고모는 식구들이 아무도 없는 날이면 혼자 집 안 곳곳에 숨겨져 있는 ‘ㅎㅇ’을 찾아다니며 놀았다.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그때만 해도 고모는 ‘ㅎㅇ’이 자신을 어떻게 쫓아다닐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후로, 고모는 다섯 명의 남자를 더 사귀게 되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이름에 ‘ㅎ’과 ‘ㅇ’이 들어갔다. 다섯 번의 이별을 겪으면서, 고모는 곰인형 열쇠고리를 선물했던 남자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