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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세상이 심심해요? 하고 취재를 온 기자에게 물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왜 신기한 거요?” 외할머니가 보기에는 뒤집힌 차에서 살아나는 것은 기적에 속하지도 않았다. 외할머니의 단골손님 중에는 트럭에 깔렸지만 뼈 하나 부러지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부인이 교통사고가 나서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가려던 여행을 포기했는데, 묵을 예정이었던 호텔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사람도 있었다. “시멘트 반죽에 빠졌던 사람 이야기도 해줄까요?” 외할머니는 시멘트 반죽에 빠져 죽다 살아난 남자의 이야기를 내게 세 번이나 들려주었다. 항상 혼자 와서 족발과 소주 두 병을 먹고 갔다고, 그렇게 십 년이나 드나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발길을 끊었다고, 외할머니는 말했다. 그 사람 좋아했어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기자는 외할머니에게 한번 쓴 지폐가 다시 돌아온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돈에다 이름을 써놓은 것도 아니고.” 외할머니의 옆 침대에 누워 있던 고모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짜로 돈에 이름을 써놓았었죠.” 기자가 말을 시작하자 할머니가 고모의 침대로 건너왔다. “할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했어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만한 배짱은 없었죠. 아버지가 어릴 적 교통사고를 당할 뻔했는데 그걸 할아버지가 몸으로 막았거든요.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내가 누구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라고 말했어요. 그 한마디로 아버지는 결혼을 포기했죠.”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헤어지면서 아버지는 그 흔한 반지 하나 선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서로 돌려줄 물건이 하나도 없었던 거예요. 그때 어머니가 지갑에서 천원짜리 하나를 꺼냈어요. 어머니가 거기에 이름을 적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이름을 적으라고 했죠.” 이름이 적힌 천원짜리 지폐는 공원 앞에서 구걸을 하는 거지의 깡통에 들어갔다. 그날 밤 거지는 그 돈으로 칼국수를 사먹었고, 칼국수 주인은 그 돈을 P시에서 출장 온 어느 사내에게 거스름돈으로 건네주었다. 그후로 삼 년 동안 천원짜리는 P시를 돌고돌아다녔다. “아버지는 P시에 놀러 갔다가 그 지폐를 발견했어요.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내고 거슬러받은 돈이었죠. 그 돈이 없었다면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기자의 이야기를 들은 후, 외할머니는 가방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었다. “할 수 없네. 이왕이면 예쁘게 찍어줘요.” 아버지는 이마의 꿰맨 상처가 신경이 쓰이는지 앞머리를 자꾸만 앞으로 내렸다. 사진을 찍으려다 말고 기자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그런데 아까 모두 아홉 명이라 그러지 않았어요?” “몰랐어요? 다른 병원에 있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기자가 수첩에 무엇인가를 끼적이면서 한가족인데 병원이 다르다니, 하며 중얼거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가 그런 배부른 소리 하지 마요, 하며 소리쳤다. 깜짝 놀란 기자가 펜을 떨어뜨렸다. 신문사 입사시험에 합격한 기념으로 산 펜이었다. 스스로에게 선물한 최초의 물건이었는데, 포장코너에 가서 오천원을 주고 따로 포장을 했다. 그걸 첫 출근 날까지 간직하고 있다가 책상을 배정받자마자 자리에 앉아 포장을 뜯었다. 그러면서 결심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구두 뒤축을 갈 정도로 뛰어다니겠다고. 할머니가 그냥 일곱 명만 사진을 찍으면 안 되겠냐고 하자 기자는 그러면 기사를 싣지 않겠다고 우겼다. “나머지 두 명은 따로 사진을 찍어서 옆에 붙여요.” “전 지금 링거 맞고 있어요.” “그럼 거기 두 사람을 여기로 데리고 와요.” “가면 우리가 가야지. 걔네들은 다리가 부러졌잖아.” “난 우리 이야기가 뉴스거리가 되는 게 도대체 이상해.” “참, 무슨 신문이라고 했죠?” 식구들이 너도나도 떠드는 동안 기자는 누군가에게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고, 휴대폰의 문자메시지를 읽는 기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온 식구들이 병원복을 입고 가족사진을 찍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에요.” 기자의 말에 온 식구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서 우리는 삼촌들이 입원한 병원으로 갔다. 기자가 몰고 온 차를 탔는데, 그 차 역시 9인용 승합차였다. “난 다시는 봉고는 안 타려 했는데.” 차에 올라타면서 할아버지가 말했다. 작은삼촌은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고 큰삼촌은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휠체어에 앉은 삼촌들을 가운데 두고 식구들이 빙 둘러섰다. 나는 삼촌들 가운데 섰다. 이마의 멍이 눈으로 내려와 팬더처럼 보였고, 그래서 나는 손으로 V자를 만들어 양쪽 눈을 가렸다. 기자가 하나, 둘, 셋, 하고 외쳤다. 다음날 아침, 할아버지는 병원 로비를 서성이며 신문이 배달되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간호사에게 가위를 빌려 사진을 오렸다. 그리고 그걸 접어서 지갑에 넣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다시는 그 사진을 꺼내 보지 않았다. 그건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