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기 전날, 아버지는 회사에서 봉고를 빌려왔다. 봉고는 영업부의 김대리가 몰던 것인데, 조수석의 의자가 갈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김대리는 그 얼룩을 볼 때마다 얼마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생각났다. 김대리의 취미는 지방의 한적한 국도변에 있는 버스정류장의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김대리는 말했다. “이 할머니는 글쎄 한 시간째 버스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아버지는 이십 년은 훨씬 지난 듯한 포스터가 아직 붙어 있는 버스정류장의 사진을 보면서, 술을 마시면서 김대리 흉을 보았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김대리는 그 버스정류장에서 여자친구를 만났다. 여자는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신발을 벗고 물집이 난 뒤꿈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김대리는 그 모습을 찍었다. 그날 김대리는 여자를 서울까지 데려다주었다. 여자는 고맙다며 휴게소에서 커피를 사왔다. “헤이즐넛은 아니죠?” 김대리가 여자가 내민 커피를 받으면서 말했다. 그 말에 여자가 그건, 최악이죠, 하고 대답했다. “맞아요.” 김대리는 얼마 전에 책을 읽었는데, 실연을 당하고 우울증에 빠진 주인공이 집에서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혹시 그 책에 이런 문장 있지 않았어요? 헤이즐넛 향이 거실에 은은하게 퍼졌다.” 여자의 말에 김대리가 맞아요, 맞아요, 하면서 웃었다. 그때 앞차가 비상등을 켰다. 김대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여자가 들고 있던 커피를 쏟았다. 커피는 여자의 허벅지를 적시고 의자로 스며들었다. 결국, 여자는 뒷자리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김대리는 운전을 하면서 룸미러로 여자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았다. 김대리가 사랑에 빠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아버지는 김대리에게 키를 받으면서 회사 차라고 너무 지저분하게 쓴 거 아니야, 하고 말했다. 그 말이 섭섭했던 김대리는 가다 펑크나 나라,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할머니가 봉고를 보더니 담배 냄새가 너무 나서 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냄새 제거제를 뿌려보았지만 담배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김대리는 골초였다. 담배는 여자가 김대리와 헤어지기로 결심하게 한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큰삼촌은 초를 켜두면 담배 냄새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고모의 방에는 눈사람 모양의 초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나는 고모 방으로 달려가 눈사람 모양과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초를 가지고 왔다. 초에 불을 붙이자 달콤한 향이 차 안에 퍼졌다. 초가 탈 동안 할머니는 정육점에 고기를 사러 갔다. “소고기로 사와.”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나와 큰삼촌은 마당 벤치에 앉아서 벤치가 그네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네를 타는 것처럼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아버지는 옆집에 아이스박스를 빌리러 갔다. 아이스박스 바닥에 아이스크림이 끈적끈적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마당 수돗가에 아이스박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이스박스에 물을 채워두었다. 그때, 군복을 입은 작은삼촌이 마당에 들어섰다. 살이 쪄서 가뜩이나 작은 눈이 더 작아 보였다. “집 앞에 있는 차는 뭐야? 연기가 나네.” 작은삼촌이 말했다. 놀란 아버지가 봉고로 달려갔다. 앞좌석에서 연기가 새어나왔다. “물 가져와.” 아버지가 큰삼촌에게 소리쳤다. 큰삼촌이 아이스박스를 번쩍 들더니 대문 열어, 하고 소리쳤다. 작은삼촌이 재빨리 대문을 활짝 열었다. 큰삼촌이 조수석 쪽 문을 열더니 아이스박스에 들어 있는 물을 차 안으로 끼얹었다. 의자는 등받이만 남기고 모두 탔다. 물론, 커피 얼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물이 흥건한 봉고 안에서 반쪽만 남은 눈사람을 찾아냈다.
하마터면 봉고를 태울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고모는 식구들에게 그 초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아느냐고 화를 냈다. 나는 몸통과 팔 한쪽이 남은 눈사람 초를 고모에게 돌려주었다. “내가 그랬어. 미안!” 나는 말했다. “올 크리스마스 날 이보다 더 멋진 걸로 선물해줘.” 고모가 대답했다. 나는 내가 그럴 돈이 어디 있냐고 대꾸했다. “세뱃돈 있잖아.” 고모는 그 동안 나에게 준 세뱃돈만 십만원은 넘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내 돈을 모두 빼앗아간 아버지를 째려보았다.
외할머니의 구두를 사러 백화점에 갔던 어머니는 봉고를 보자 얼굴을 찌푸렸다. 불에 그슬린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여서, 봉고는 처음 가져왔을 때보다 더 심한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서 사과 하나를 꺼내왔다. 그리고 손으로 반을 자르더니 한쪽은 앞자리에, 한쪽은 뒷자리에, 올려놓았다. “내일은 좀 나아질 거예요.” 어머니는 눈으로 봉고의 좌석이 몇개인지 세었다. 봉고는 11인승이었다. 불에 탄 좌석을 빼고도 식구들이 모두 앉을 수 있었다. 만약 9인승이었다면 한 좌석이 모자랐을 테고 그럼 여행 내내 가장 불편해할 사람은 외할머니일 것이다. 어머니는 구두가 들어 있는 쇼핑백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