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한지를 구해 부채를 만들었다. 내가 낮잠을 자면 할머니는 내 머리맡에 앉아서 부채질을 해주었다. 가끔 고모나 삼촌들도 부채질을 해주었지만 나는 잠결에도 할머니의 부채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람의 속도가 변함이 없는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다. “어머니, 팔 안 아파요?” 어머니가 물으면, 할머니는 처녀 시절에 팔굽혀펴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자랑을 하곤 했다. “일분에 오십 개는 족히 했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내게 부채질을 해주었을 것이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식구들은 오랫동안 간이 맞지 않는 음식을 먹었다. “너무 짜요.” “엄마, 이건 국이에요? 찌개예요?” “한 달 내내 된장찌개인 거 알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할머니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 수학 삼십점 맞았을 때 내가 혼냈니? 그리고, 넌, 문방구에서 그 뭐냐 장난감 조립하는 거. 그거 훔쳤을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봐.” 옆에서 말없이 밥을 먹던 할아버지가 도둑질을 했는데도 안 혼냈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당신 돈 조금 벌어왔다고 내가 잔소리한 적 있어요? 그러니 아무도 내게 잔소리하지 말아요.”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 식구들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밥을 먹었다. 그래도 장조림은 잘해요, 라고 중얼거리면서.
부채질을 하면서 할머니는 속삭였다. ‘누가 뭐래도 니 맘대로 살아야 한다.’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을까봐 길에 껌봉지 한번 버린 적이 없던 어머니는 기저귀를 갈 때마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라고 말했다. 고모는 내 귓불을 살짝 깨문 다음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귀가 간지러워서 나는 웃었다. 고모는 박수를 치면서 내 말을 알아듣나봐, 라고 말했다. 작은삼촌은 얼른 커서 나랑 같이 술 마시자, 라고 말했다가 할머니에게 등짝을 맞았다. 아버지는 12개월 할부로 산 캠코더로 자고 있는 내 모습을 찍었다. “건강한 게 최고지.” 큰삼촌은 내 옆에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노트에 무엇인가를 끼적였다. 내가 또래보다 일찍 몸을 뒤집은 것은 그래서였다. 큰삼촌의 노트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궁금해서.
식구들은 큰삼촌이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큰삼촌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면서 이렇게 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단다, 라고 말하는 걸 좋아했다. 큰삼촌은 지구 저편에서 발굴된 화석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사온 날 만났다는 분홍색 잠옷을 입은 여자아이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처음 만날 때 나랑 나이가 같았지.” 큰삼촌은 저녁이면 마당 벤치에 앉아 그 아이가 오길 기다렸다가 도통 머리를 감지 않는 짝과, 당구대로 만든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선생님과,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어느 여자애의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떨었다. 삼촌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기저귀가 금방 축축해졌고, 그래서 나는 자주 울었다. “이런 울보. 걱정 마. 이젠 여기 안 사니까.” 큰삼촌은 나를 늘 울보라고 불렀다. 훗날,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후에야, 나는 큰삼촌이 내 진짜 이름을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사온 지 일 년이 지났고, 그제야 삼촌은 여자아이에게 떠나라고 말했다. “왜?” 아이가 물었다. “이제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아졌으니까. 그리고, 너는 구구단도 외우지 못하고 죽었잖아. 다시 태어나서 구구단을 외워야지.” 나는 정말 떠났어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할 줄 아는 말이 몇 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 옹알거렸다.
“얘가 말을 했어요.” 큰삼촌의 말에 안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할머니가 거실로 나왔다. 어머니는 칼을 손에 든 채 부엌에서 달려나왔다. “뭐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물었다. 그러고는 손에 쥔 칼을 보고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칼을 내려놓았다. 그사이 큰삼촌은 캠코더의 전원을 켰다. “다시 말해봐.” 큰삼촌이 내 볼을 꼬집었다. “엄마라고 말했어요?”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아니요. ‘이런’ 이렇게 말했어요.” 그 말을 들은 할머니가 한지가 다 찢어지고 살밖에 남지 않은 부채로 큰삼촌의 머리를 때렸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내 말이 끝나자 이런, 하고 대꾸했다니까요.” 어머니는 다시 저녁을 지으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녁 밥상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식구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큰삼촌의 말을 믿은 사람은 작은삼촌뿐이었다. “난 쟤가 시큰둥한 아이가 될 줄 알았어. 형이 그랬잖아.” “내가 언제?” “형은 한 번도 다정한 적이 없었어.” 아버지는 학창시절 용돈을 받으면 늘 육교 아래에서 구걸을 하는 걸인들에게 돈을 주었다는 사실을 동생들에게 말하려다 말았다. 대신 생선의 가시를 발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어머니의 밥그릇에 올려놓았다. “왜 고모라고 말을 안 하지?” “아가씨, 저도 아직 엄마 소리도 못 들어봤어요.” 그날 저녁, 큰삼촌은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그러고는 설거지를 하겠다며 앞치마를 둘렀다. “뒤집는 것도 내가 처음으로 보았고 말하는 것도 내가 처음으로 들었어요. 그러니 특별 보너스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