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고모는 불을 켜고 잠을 잤다. 식구들은 고모의 방을 지날 때마다 문틈으로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잠을 자다 아침이 밝았는지 알고 깜짝 놀라 깨면 늘 새벽이었다. 그러면 고모는 증조할머니의 유품인 라디오를 틀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 네시에 일어나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트럭 운전기사가 보낸 부인의 생일을 축하해달라는 사연을 들으면서 고모는 커튼을 달았던 자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천장을 보고 ‘해피 버스데이’라고 중얼거려보았다. 고모의 담임선생님들은 가정통신란에 또래보다 조숙하고 신중한 편이라고 적었다. 할머니는 고모를 임신했을 때 낳을까 말까 망설였는데 그 때문에 아이가 조숙해진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가정통신란에 도장을 찍으면서 어렸을 때 경운기에 깔려 죽을 뻔했던 사람을 구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술을 마시면 네 아이 중 딸년이 날 가장 많이 닮았어요, 하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당신들의 막내딸이 친구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도시락을 남기는 짝에게 새벽 네시에 건물 청소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하고 말하는 아이를 좋아할 친구는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고모는 분가할 거야? 하고 물었다. “축하한다는 말도 안 하고. 섭섭한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버지는 누군가 분가할 것인지를 물어주길 바랐다. 아버지의 통장에는 지하방 하나 얻을 돈도 없었다. 아버지는 마당 한쪽에 방 두 칸짜리 집을 짓길 바랐다. “마당에 새로 방을 드려요.”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낸 큰삼촌이 말했다. 큰삼촌은 식구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었다. “모은 돈은 얼마나 되는데?”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제야 아버지는 생각보다 집안에 돈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너하고 오빠하고 방을 바꿔라.” 할머니가 고모에게 말했다. “거봐. 그럴 것 같아서 내가 분가할 건지 물은 거야! 그리고 난 고3이잖아.” 할머니가 방을 바꿔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댔다. 그 방이 집에서 두번째로 크다는 것. 부엌이 옆에 있다는 것. 이층에는 화장실이 없다는 것. 아버지가 망설이는 고모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곧 조카도 생기는데.”
아버지의 방에서는 하늘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을 바꾼 후에야 고모는 지금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붉은 벽돌로 쌓은 앞집뿐이었다. 창틀에는 깡통 두 개가 매달려 있었는데, 하나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고 다른 하나에는 빗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창틀에는 담배를 비벼끈 흔적이 보였다. 담뱃불 자국이 난 창틀을 만지면서 고모는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은 뭐였지? 하고 생각해보았다.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적이 있던가? 어떤 노래를 즐겨 부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고모는 화가 났다. 하지만 누구에게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다섯 번씩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국사교과서를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이층에 살게 되면서 고모는 큰삼촌과 작은삼촌의 방을 몰래 드나들며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작은삼촌은 집에서는 재수학원을 다닌다고 말을 했지만 실제로 학원을 다니지는 않았다. 작은삼촌이 사수를 할 때까지 고모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모르는 수학문제를 체크해두었다가 식구들이 모두 모인 저녁 자리에서 물어보곤 했다. 큰삼촌이 실연을 당하고 죽을 결심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모는 가짜로 우울증에 빠진 척을 했다. 고모는 밤마다 잠이 오지 않는다며 큰삼촌의 방문을 두드렸다. 큰삼촌은 고모를 위해 야식을 만들었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코미디언 흉내를 냈다. 고모는 식구들 몰래 삼촌들의 이야기를 방송국에 보냈다. 분명 고모가 쓴 편지였지만,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사연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 저런 일이.’ 자신이 보낸 편지였는데도 다른 사람의 사연인 것처럼 놀라는 일이 잦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