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상을 보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할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고모는 물 좀 떠와라, 하는 증조할머니의 목소리가 하루 종일 들리는 듯했다. 그때마다 고모는 성냥으로 귀를 후볐다. 식구들이 고모의 버릇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중이염이 중증이 된 후였다. 고모는 평생 수영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텔레비전에 해수욕장 장면이 나올 때마다 증조할머니에게 물을 떠다 드리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쌤통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이었다. 고모는 할머니에게 방에 커튼을 쳐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는 이사를 오면서 새 커튼을 해 달았는데 또 무슨 커튼이냐고 물었다. “그거 말고. 이렇게 방 가운데 커튼을 달아줘.” 고모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텐트처럼 말이야. 그럼 내 방이 생기잖아.” 그 말을 들은 증조할머니는 장 속에 숨어 있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았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어둠 속에 가만히 있으면 평소에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해줘라.” 증조할머니가 할머니에게 말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천장에 커튼을 달아주었다. 고모는 커튼을 친 다음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누웠다. 형광등이 증조할머니 쪽에 있어서 고모만의 방은 어두웠다. 불을 끄는 것은 늘 고모의 몫이었기 때문에, 고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꺼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생각했다. 한참 후에 증조할머니가 자니, 하고 물었다. “안 자면 물 좀 떠와라.” 고모는 낮에 본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하는 중이었고, 그 상상을 깨기 싫어 대답하지 않았다. 고모는 늦잠을 잤다. 일어나 커튼을 쳐보니 새벽이면 일어나 국민체조를 하던 증조할머니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증조할머니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고모는 가위로 커튼을 잘라버리겠다고 결심했다. 커튼만 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평소처럼 증조할머니와 한 이불에 누워 잠을 잤더라면 심장이 멈춘 것을 알아차렸을 거라고 고모는 생각했다. 하지만 색종이를 자르는 문구용 가위로는 커튼이 잘라지지 않았고 손에 물집만 잡혔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마당에 작은 싹이 하나 돋았다. 상을 태운 자리였기 때문에, 식구들은 그것을 증조할머니가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자갈을 구해와 싹 주변에 둥그렇게 쌓았다. 고모는 그 싹이 무엇으로 자랄지 궁금하다며 나무도감을 사달라고 졸랐다. 할아버지가 책을 사주었지만 아무리 책을 들여다봐도 그 싹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모는 하루에 한 번씩 물을 주면서 그것이 얼른 자라기를 기다렸다.
식구들의 생각과 달리 싹은 증조할머니가 보낸 선물이 아니었다. 하숙을 쳤던 부부가 살던 때였다. 과수원 농사를 지었던 부부는 아침마다 사과를 한 쪽씩 먹는 버릇이 있었다. 과수원을 새로 인수한 사람이 같은 고향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부는 자신들이 십여 년간 농사를 지었던 그 사과나무의 사과를 사먹을 수 있었다. 하숙생 중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남자는 새벽이면 광에 들어가 사과 하나를 꺼냈다. 마당에 서성이며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두어 번 중얼거린 후 사과를 먹었다. 그리고 입속에 씨를 모아두었다가 마당을 향해 뱉었다. 씨는 하숙집을 들고 나는 사람들의 발에 밟혀 땅속으로 파묻혔다. 다음에 집을 산 부부는 마당에 앵두나무를 심었다. 부모님들이 앵두나무를 심는 동안 어린 딸이 모종삽을 가지고 마당에서 놀았다. 그래서 하숙생이 뱉었던 무수한 사과 씨들은 더 깊숙이 땅속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상을 태운 후 그 재들을 그냥 마당에 버려두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렸고 그 재가 땅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때,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과 씨 중 하나가 가까스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싹이 나무 모양으로 자라는 데는 이십 년이 넘게 걸렸다. 작은삼촌은 거름이 되어야 한다며 나무 아래에 오줌을 누웠다. 앙상한 가지는 좀처럼 굵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나무에 붉은 열매가 하나 달렸다. 이십이 년 만에 맺은 첫 열매를 딴 사람은 막 걸음마를 시작한 나였다. 나는 그 열매를 따서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떪은 맛이 어떤 것인지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찡그린 내 얼굴을 보고 고모가 웃었다. 아버지가 사진기를 들고 그 모습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