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백 개씩 돼지족발을 썰면서 외할머니는 고향집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생각하곤 했다. 시계에 밥을 주는 일은 언제나 외할머니 담당이었다. 키가 작은 외할머니를 위해 시계 밑에는 다듬잇돌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올라서서 까치발을 하고 태엽을 감으면 세상이 자신을 위해 멈춰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향집을 떠날 때만 해도 외할머니는 다신 그 시계에 밥을 줄 수 없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터미널 다방에서 그 남자를 기다릴 때만 해도 몇 달 후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약속장소에 나오질 않았다. 외할머니는 쌍화차 한 잔을 시키고 일곱 시간을 다방에 앉아서 남자가 보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다방을 나오면서 외할머니는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단다. 근데, 절대 니 아비 얼굴만은 닮지 말거라. ‘주방보조구함’이라고 적힌 식당 문을 열 때까지 그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난방이 되지 않은 식당에서 의자를 붙이고 잠을 자면서, 손님들이 남긴 반찬을 양재기에 담아 밥을 비벼 먹으면서, 외할머니는 이런 결심을 했다. 이애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일이 있어도 방 두 개짜리 집을 사겠어! 어머니가 외할머니에게 결혼할 남자가 있다고, 아이를 가졌다고, 쉽게 말을 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였다. 방 두 개짜리 집에 외할머니 혼자 남을 테니까.
내가 뱃속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자주 거울을 보았다. 자주 이를 닦았다. 그리고 변기에 앉아서 초등학교 이학년 때 문방구에서 지우개를 훔친 일을 생각했다. 딱히 지우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필통에는 지우개가 두 개나 있었으니까. 지우개를 보는 순간 체육시간에 줄넘기를 한 개도 하지 못한 자신이 떠올랐고,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지우개를 집어들었다. 어머니는 지우개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우개를 만지작거렸다. 지금 그 지우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눈물이 났다. 변기 물을 내리면서 어머니는 자신이 그때로부터 얼마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겁이 덜컥 났고, 어머니는 안방으로 건너가 잠든 외할머니의 이 가는 소리를 오랫동안 들었다.
잠든 외할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어머니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엄마 어떻게 할까요?
외할머니가 어젠 말이다, 하면서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피아노를 연주한 사람은 옆집 아이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십 년 전에 친구에게 오백만원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를 다시 본 것은 텔레비전에서였다. 친구는 다섯 번의 부도 끝에 재기에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성공비결>이라는 프로그램의 게시판에 들어가 글을 남겼고, 원금의 몇 배가 되는 이자를 들고 친구가 찾아왔다. 아이의 아버지는 오백만원을 뺀 나머지 돈을 돌려주었다. 거실 구석에서 멜로디언 연주를 하던 아이는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주일 후, 아이 앞으로 피아노 한 대가 배달되었다.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피아노를 보는 순간 아이의 꿈은 바뀌었다. 피아노를 선물받은 아이는 너무 설레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그래서 새벽부터 일어나 자기가 칠 줄 아는 동요를 치기 시작했다. 음정 박자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어머니는 음을 따라 흥얼거렸다. 그러자 피아노를 치는 누군가의 손가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길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어머니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열 손가락이 제각각 움직이는 걸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손가락은 참 놀라워요.” 외할머니가 눈을 떴다. “왜? 무슨 일이야?”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피아노 소리를 들어보라고 말했다. 외할머니가 다시 눈을 감고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팔굽혀펴기를 하고 싶어졌다. 인간 말고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는 동물이 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외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 너 없으면 남자친구도 맘껏 집으로 불러들일 거다. 그건 그렇고, 옆집 꼬마가 우리 손자의 목숨을 구했네.” 그때 뱃속에서 나는 열손가락을 꼼지락거렸고 어머니는 간지러운지 배를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