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마당 한 귀퉁이에 있는 아이스박스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낮에 수세미를 팔러 왔던 사내에게서 났던 그런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까치발을 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이스박스는 몸에 딱 맞았다.(아이스박스 안에 누워 손톱으로 스티로폼에 십자 모양의 자국을 내며 아버지는 낮에 왔던 사내를 떠올렸다. 왼팔이 없는 사내는 수세미 천 개를 팔아야 의수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 구백구십 개를 팔거든 다시 와요. 그때 열 개를 사드릴게요. 할머니가 말했다. 아버지는 ‘의수’라고 중얼거려보았다. 이상한 단어였다. 아버지는 아이스박스 안에 손톱자국을 천 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홉까지밖에 셀 줄 몰랐고, 그래서, 아홉까지 세고는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루에 있는 상을 집어던졌다. 상다리가 부러졌다. 어떤 옷을 입었죠? 경찰이 물었다. 할머니는 흰색 티셔츠에 빨간 반바지를 입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증조할머니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파란 반바지에 난닝구 입었다. 작년 생일날 내가 사준 바지잖니. 올 봄에 부쩍 커서 이젠 허리가 꽉 낄 텐데. “그제야 식구들은 할머니가 색맹이라는 걸 알았어요.” 아버지 이야기를 듣던 어머니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우리 엄마는 초록색을 파란색이라고 말해요, 색맹도 아니면서, 하고 말했다. 증조할머니는 옆집에 사는 과부를 의심했다. 죽은 아들을 닮았다며 유난히 아버지를 예뻐한 여자였다. 지난번에는 한 번만 내 손자를 데리고 자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하더라니까. 뭐, 죽은 아들 기일이라나. 경찰은 수첩에 옆집 여자의 이름을 적었다. 할머니는 수세미 외판원에게 유괴를 당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수세미를 사지 않아서 앙심을 품었을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경찰은 비웃기만 했다. 증조할머니는 동사무소로 가서 안내방송을 했다. 사대독자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걱정 마요. 여섯 살때까지만 사대독자였으니까. 다행이죠. 누가 사대독자와 결혼하겠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방금 한 말이 프러포즈인지 아닌지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동네 뒷산을 뒤지는 동안, 아버지는 아이스박스가 여섯 번이나 버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돼지껍데깃집을 했던 부부가 첫번째 주인이라는 것. 바다에 빠진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는 것. 아이스박스를 보트 삼아 섬까지 가려던 소년 때문에 영원히 바다 위를 떠돌 뻔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오 년 동안 주인이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도 너처럼 다섯 살이야. 아버지가 아이스박스에게 속삭였다. 다섯 살. 그렇게 말을 하고 나자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배가 고파지자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아버지는 아이스박스의 뚜껑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 중 누군가 아이의 소식을 물으려고 왔다가 마당에 내동댕이쳐진 상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아이스박스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엄마, 하고 불러보았다. 엄마, 라고 부를수록 오줌이 마려워졌다.
아버지가 발견된 것은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 링거를 맞는 동안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아이스박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목회 회원들이 아이스박스에 술을 가득 채워 야유회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 버렸다고. 아이스박스는 보름달이 초승달이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아들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더 필요해요. 그러자 증조할머니가 할머니의 두 손을 잡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부터 살림은 내가 하마. 넌 부엌에는 얼씬도 마라. 할아버지는 아들 낳는 한약을 짓기 위해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갔다.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거기서 이박삼일 동안 줄을 선 뒤 할아버지는 한약을 지어왔다. 약을 먹기 전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라고 말했다. 화가 나면 저 뒷산에 가서 소리를 지르고 올게. 할아버지가 약속했다. 할머니는 한 번만 더 상을 집어던지면 도망을 가버릴 거라고 협박한 뒤에 한약을 마셨다. 증조할머니는 찬장 깊숙한 곳에서 가운데가 움푹 파인 도마를 꺼냈다. 친정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도마였다. 할아버지는 아무리 술이 마시고 싶어도 막걸리 두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고, 할머니는 졸린 눈을 비비며 삼십육 개월 할부로 산 백과사전을 ‘ㄱ’ 부터 차례대로 읽기 시작했다. “일 년 후 남동생이 태어났어요. 어머니는 백과사전을 반도 읽지 못했죠. 다시 일 년 팔 개월 후 둘째동생이 태어났죠. 어머니가 ‘조로아스터교’란 항목을 읽고 있을 때 통증이 찾아왔다고 해요. 여동생은 백과사전을 다 읽은 후에 태어났고요. 셋 중 누가 공부를 가장 잘했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둘째동생이요, 하고 대답했다. “직접 물어보세요, 동생들한테.” 그 말을 들은 순간,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어머니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좋다고 말해요, 어서. 어머니는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