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생은 열여섯 살 때 짝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눈이 내리는 겨울이었다. 잠결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깨어보면 사방이 너무나 조용한 그런 날이었다. 자신을 깨운 게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전학생은 홀로 진공상태의 공간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날은 창문을 열어보면 영락없이 눈이 내리고 있잖아. 그것도 함박눈이.”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지만 사방이 환했다. 저 멀리 눈에 덮인 비닐하우스들이 마치 언 호수 위에 눈이 쌓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전학생은 아침이 될 때까지 창문을 열어두었다. 눈이 방 안으로 들이칠 수 있도록. 하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이었고 몇 송이 눈만이 창틀 위에 내려앉았다. 전학생은 아버지가 입다가 물려준 자신의 잠옷을 보았다. 보라색 줄무늬였는데, 화장실에 갈 때마다 밑단을 밟아 넘어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자랄 거잖니. 전학생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밑단을 줄여주지 않았다. 처녀 시절에는 쇼핑도 즐기던 여자였는데, 결혼을 한 뒤에는 립스틱 하나로 오 년을 버티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말도 못 하게 짠돌이거든.” 가스비가 천원만 더 나와도 왜 더 나왔는지를 따지는 남편을 볼 때마다 전학생의 어머니는 첫사랑의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첫사랑의 남자는 술만 취하면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날이면 애꿎은 입간판들을 부쉈다. 옆자리 남자들이 자신을 보고 웃었다며 이 두 개를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남자의 코밑에 밥풀이 하나 붙어 있었고 그래서 웃었다고, 이가 부러진 사람이 말했다. 전학생의 어머니는 밥풀이 붙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음식을 다 먹은 후 웃으면서 얼굴에 밥풀이 묻은 것도 몰랐지! 하고 말해줄 생각이었다. 시골에 계신 남자의 부모님이 소를 팔았다. 전학생의 어머니는 사람을 팰 때마다 소를 판다면 나중에 집도 팔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남자에게 헤어지자는 편지를 보냈다. 남자가 몇 번 집으로 찾아왔지만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 전학생의 아버지는 술을 잘 못 했다. 소주 세 잔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졌고 다섯 잔을 마시면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전학생의 어머니는 맞선을 본 남자가 술을 잘 못 한다는 것과 여동생이 두 명 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임신을 했다. 전학생은 잠옷 단을 접은 후 방에서 나왔다. 어머니가 아침밥을 하고 있었다. “엄마, 눈 와요.” 전학생이 말했다.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엄마!” 그러자 어머니가 왜 세수하게 보일러 틀어줘? 하고 대답했다. 전학생은 쌀을 씻고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릇을 빼앗았다. “이리 와보세요.” 전학생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거실 창으로 갔다. “이것 봐요. 눈이 와요. 저기 호수에도 눈이 쌓였어요.” 전학생은 멀리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거짓말을 했다. “정말. 언제부터 호수가 있었지?” 어머니가 말했다. 이 집에 이사를 온 지 오 년이 넘었건만 전학생의 어머니는 거실 창으로 밖을 내다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해야 했고, 마트로 출근을 해서 하루 종일 계산을 해야 했다.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밖은 늘 깜깜했다. 전학생은 호수에 가면 오리들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 뜬금없이 어머니가 첫사랑에 대해 말을 했다. 오리배를 자주 탔다고. 군고구마가 식지 않도록 가슴에 품고 온 적도 있었다고. “성공을 하면 내 이름으로 된 빌딩을 지어주겠다고 했는데.” 그때, 방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밥 안 하고 뭐 해,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 오늘 아침은 빵을 먹어요. 제가 사올게요.” 전학생이 말했다. 전학생의 아버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 빼고는 아침밥을 거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너나 먹어라. 난 밥.” 전학생이 아버지에게 눈이 내려요, 하고 말했다. “이런 날까지 엄마가 밥을 해야겠어요?” “그럼 저 북극에 사는 사람들은 누가 밥을 하냐! 거긴 종일 눈이 내릴 텐데.” 아버지가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전학생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입었다. 밖으로 나온 전학생은 가게에 들어가 유통기한이 지난 소보로빵을 하나 샀다. 빵을 주머니에 넣고 하염없이 걸었다. 걷다 뒤돌아보면 흰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만이 보였다. 한참을 걸어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에 도착을 했다. 전학생은 문이 잠겨 있는 비닐하우스를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비닐하우스를 발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양쪽으로 빽빽하게 버섯들이 보였다. 전학생은 구석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빵을 먹었다. 비닐하우스 안은 더웠다. 금방 속옷이 땀에 젖어 축축해졌다. 바지 안에 잠옷을 입은 것을 이내 후회했다. 이대로 죽게 된다면, 병원 간호사들이 이틀이나 갈아입지 않은 팬티와 무릎이 튀어나온 잠옷을 보고 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빵을 먹다 말고 가슴을 쳤다. 무슨 버섯인지 모르지만, 전학생은 나무에 자라는 버섯 하나를 따서 먹었다. 몇 번 씹다가 이내 바닥에 뱉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전학생은 다시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게 주인들이 가게 문 앞에 쌓인 눈을 쓸고 있었다. 누군가 이런 날도 운동을 하는구나, 하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하고 말해주었다. 전학생은 십자수가게 앞에서 눈을 쓸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빗자루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여자가 전학생의 팔을 잡고는 어머, 하고 말했다. 전학생은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작년 여름에 가게 밖에 서서 십자수를 하는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여자의 옷은 파여 있었고 그래서 여자가 고개를 숙여 수를 놓을 때마다 가슴골이 보였다. 전학생은 빨간 목도리를 한 여자를 보자 몰래 훔쳐보았던 여자의 가슴이 떠올랐다.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려 했지만 전학생은 자기도 모르게 에취, 하고 기침을 했다. 한번 기침을 시작하자 멈추지 않았다.